ⓒ정켈 그림

“1겹의 속옷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하루 동안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생활하는 ‘노브라 챌린지’를 마치면서 자신의 SNS에 남긴 소감이다.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에서 언급한 ‘1인치의 장벽(자막)’에 빗대, 브래지어 없는 하루가 자신에게는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을 담은 글이었다.

그의 도전은 2월13일 방송된 MBC 교양 프로그램 〈시리즈 M〉에서 이뤄진 실험의 일환이었다. ‘인간에게 브래지어가 꼭 필요할까?’라는 주제로 남성 셋은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여성 셋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24시간을 보냈다. 전문가의 사이즈 측정을 거쳐 체형에 맞는 브래지어를 골랐지만 남성 참가자들의 몸에는 속옷 자국이 남았다. 명치를 옥죄는 와이어와 자꾸 흘러내리는 어깨끈이 갑갑하다는 호소도 이어졌다. 난생처음 ‘노브라’에 도전한 여성 참가자들은 혹시나 유두가 도드라질까 봐 순간 움츠러드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하루 동안 편안함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브래지어를 거부하는 여성이 왜 늘고 있는지, 그럼에도 여전히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무엇인지를 보여준 방송이었다.

높은 장벽이 되어 돌아온 ‘1겹의 속옷’

방송이 나간 뒤, ‘1겹의 속옷’은 생각보다 높은 장벽이 되어 돌아왔다. 실험의 의도보다는 ‘아나운서가 노브라로 생방송을 진행했다’는 부분만을 강조한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임 아나운서의 SNS에도 “개인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을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가 있느냐”라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 하지만 이 비난이 성립하려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브래지어 착용 여부, 나아가 여성의 가슴이 온전히 개인의 영역에 속해 있었는지부터 되물어야 한다.

2016년, 방송인 정가은은 자신의 딸에게 모유수유하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야하다”거나 “관종(관심 종자)”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2018년 부산의 한 여자 중학교에서는, 브래지어 색상을 지정하고 그 위에 또 내의를 입어서 브래지어가 비치지 않게 하라는 교칙 때문에 재학생의 반발을 샀다. 성적 대상화와 엄숙주의가 뒤섞이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가슴과 브래지어는 반드시 있어야 하되 티가 나서는 안 되는 기묘한 존재가 됐다. 여성 개개인은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이 이중 잣대를 내면화해서 수시로 자신의 가슴이 어떻게 보이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노브라’는 그동안 관습에 익숙해진 자신과 먼저 맞서야 하는 도전이다. 남에게 보이는 몸이 아닌, 내가 느끼기에 건강하고 편안한 몸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는 일은 ‘개인이 알아서’ 할 수 있을 만큼 만만치는 않다. 처음엔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그럼에도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하다고 말하는 여성의 존재가 반갑고 귀한 이유다. 임 아나운서를 비롯해 노브라가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고(故) 설리씨, EBS 〈까칠남녀〉를 진행하면서 30년 방송 생활 최초로 브래지어 없이 녹화에 참여했다는 코미디언 박미선씨, 그리고 언론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 수많은 여성들을 이 지면을 빌려 기억하려 한다.

기자명 양정민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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