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푸르렀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말없이/ 그녀를, 그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나는 귀여운 꿈처럼 품에 안았었다./ 우리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 떠 있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구름은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아/ 내가 올려다보았을 때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브레히트가 쓴 시 ‘마리아의 추억’을 읽으며 그는 난생처음 문학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동독 비밀경찰, 암호명 ‘HGW XX/7’의 굳센 신념이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귀여운 꿈처럼 품에 안’고 사는 예술가 커플 때문이다. 그들이 읽는 시, 그들이 듣는 음악을 남몰래 같이 읽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음악을 들었던, 진정으로 들었던 누군가라면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머물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나눈 이런 대화까지 도청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리고 음악은, 그러니까 예술은, 견고한 ‘타인의 삶’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강력하다는 걸 근사한 스토리텔링으로 설득한 영화 〈타인의 삶〉. 이 영화로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가 새 영화 〈작가 미상〉을 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옛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예술가. 삐딱하고 도발적인 예술작품을 사랑한 엘리자베트 이모(사스키아 로젠달) 덕분에 어려서부터 강렬한 미적 경험을 쌓은 쿠르트(톰 쉴링)의 이야기. 예술학교에서 만난 여인 엘리(폴라 비어)를 뜨겁게 사랑할수록, 나치에 헌신한 이력을 세탁하고 승승장구하는 엘리의 아버지 제반트 교수(세바스티안 코치)와 복잡하게 얽히는 인연이 씨줄이 되고,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서서히 완성해나가는 삶의 궤적이 날줄이 된다. 그렇게 엮어낸 189분의 장대한 드라마는,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막연한 질문에 ‘가장 개인적이어서 가장 창의적인’ 쿠르트의 답을 내보이는 과정이다.

경이로운 타인의 삶에 경배를…

〈작가 미상〉의 영문 제목 〈Never Look Away〉는 엘리자베트 이모의 대사에서 가져왔다. 낯선 예술작품 앞에서, 전쟁의 끔찍한 참상 앞에서, 그리고 인간의 혐오스러운 악행 앞에서 이모는 항상 말했다. “절대 눈 돌리지 마.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다워.” 그 한마디가 쿠르트의 나침반이었다. 절대 외면하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남들이 모면하는 처세를 궁리할 때도 끝까지 직면하는 용기를 잃지 않는 게 예술가다. 그리하여 도너스마르크의 영화에서는 이번에도, 오직 예술만이 타인의 삶을 뒤흔들 힘과 자격을 얻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정말 끝내주게 아름답다. 단지 촬영을 잘해서, 풍경이 예뻐서가 아니라, 장면에 담긴 감정과 생각과 질문이 정말 아름다워 마음을 빼앗긴 순간이 여러 번이다. 이 경이로운 타인의 삶 앞에서 나의 삶은 또 한번 초라해졌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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