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코로나19를 세상에 처음 알린 중국 의사 리원량 (아래)은 본인도 감염되어 2월6일 숨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WHO 공식명칭 COVID-19)을 처음 발견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했으나 되레 중국 공안 당국에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잡혀갔던, 풀려난 뒤로도 환자들을 돌보다 감염된 중국인 의사 리원량은 끝내 숨지고 말았다. 젊은 의사는 새로운 질병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정부를 거역하는 용기를 냈어.

어느 직업, 어느 영역에나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과 추한 사람은 있다. 의사들도 마찬가지지. 중국 정부에 용감히 맞선 리원량 같은 사람도 있지만 코로나19가 퍼지는 것을 알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 의사들도 숱하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오늘부터 몇 주 동안은 우리 역사 속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해. 리원량만큼 자신의 환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던졌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번 설에 다녀온 부산의 ‘이바구길’을 기억하겠지? 부산역 맞은편 초량의 차이나타운을 거쳐 무려 168계단을 거쳐 올라가서 부산 산복도로와 만나는 길 말이야. 이바구길을 더듬다 보면 한 의사의 기념관을 만나게 돼. 그의 이름은 장기려(1911~ 1995)다. 1928년 그는 열일곱 살에 경성의전에 입학하고 1932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스승 밑에서 조교로 일하며 실력을 쌓았어. 그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제안받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했어. 이유는 간단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나를 본 한 할머니는 청진기만 대면 병이 낫는 줄 알고 가슴에 청진기를 한 번만 대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치료비가 없어서 평생 의사 얼굴 한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춘원 이광수의 작품 가운데 〈사랑〉이라는 소설이 있어. 작가 자신이 경성의전에 입원했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1938년 쓴 소설인데, 여기에는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의사 ‘안빈’이 등장한다. 이 안빈의 모델로 알려진 게 장기려 박사야. 장기려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했지만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안빈의 모델이 장기려임을 인정했지. 〈사랑〉에 등장하는 주인공 안빈의 말이다.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오. 우리들이 사르는 사랑의 불로 중생이 간직한 사랑의 숯을 태워 이 세계를 사랑의 세계로 만드는 것 외에 더 할 일이 어디 있는가.”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 누구든 장기려의 일생은 이 말에 철저히 부합하고 있어.

평양에서 의술을 펼치던 그는 북한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지는 와중에도 계속 북쪽에 남아 있었어.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기독교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던 시절, 김일성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부로부터 뒷조사를 받는다. 그러나 살기등등한 보위부 일꾼들이 감동할 만큼 그의 행적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고 해. 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평양에 육박할 무렵, 김일성대학 병원 근처에 떨어진 포탄에 놀란 의사들이 사색이 되어 도망가자고 하자 “의사가 환자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라고 불같은 호령을 내렸던 의사의 열정은 기독교를 아편 취급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먼 훗날 뒤통수의 혹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던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가 있었으면 내 몸을 맡길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는 전언이 전해지니 알 만하겠지?

환자에게 돈 내줄 궁리를 하는 의사

국군이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허둥지둥 후퇴하는 와중에 그는 아내와 다섯 아이를 북에 남긴 채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했어. 피란민들의 도시, 살 곳이 없어 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 판잣집을 짓고 산허리를 두르는 산복도로를 낼 수밖에 없었던 부산에서 그는 외롭지만 의롭고, 고되지만 거룩한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다. 1951년 1월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전쟁과 가난에 신음하는 바닥의 사람들을 잡아준 것은 그 시초였지.

“무엇보다 잘 먹는 게 중요합니다. 꼭 잘 먹어야 해요.” 이렇게 말하는 의사 앞에서 환자는 입을 내밀었을 거야. “누가 그걸 모르나? 돈이 없어서 문제지.” 환자는 투덜거리며 의사가 써준 처방전을 들고 원무과로 갔다. 원무과 직원은 처방전을 보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어. “이 사람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주고 보내시오.”

환자에게 돈 받을 생각보다는 돈 내줄 궁리를 하는 의사는 경영자로서는 실격이고 직원들의 불만도 있었겠지. “당신은 처자식이 북에 있지만, 우리는 여기 주렁주렁 매달려 있단 말이오.” 하면서 말이야. 아무리 원장이라 해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한 환자가 원장에게 울먹였어. “퇴원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환자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어. “직원들이 퇴근한 뒤 뒷문으로 오시오. 내가 문을 열어두겠소.” 역시 치료비가 없다고 호소하는 가난한 여인 앞에서 장기려는 “오, 주여 이 어린 양을…” 하는 기도를 우렁차게 올린 뒤 그 10분의 1의 목소리로 속삭이기도 했다. “기회를 봐서 환자복 갈아입고 탈출하시오.”

장기려는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렇게 설명했어.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장기려 박사였지만 마냥 사람 좋고 인자한 사람만은 아니었어.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고 부르짖은 예수를 대신하여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기는 물신주의자들을 일생 내내 혐오한 지사(志士)이기도 했거든. “나는 무신론,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 계급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실로 인류의 여론이다. 부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가 오리라. (중략)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는 일은 없는가? 아, 크리스천이 믿음의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단순한 동정심조차 일으키지 않고 조금의 기부금도 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얼마나 저주받은 사회인가.”

ⓒ성산장기려기념사업회 제공장기려 박사는 1951년 부산 영도에 ‘천막병원’인 복음병원을 세웠다. 왼쪽은 1957년 복음병원의 의료진 및 환자와 함께한 장 박사(뒷줄 왼쪽 다섯 번째).

그는 평생 버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가불투성이 인생을 살았다. 기력이 있을 때까지 무의촌을 돌며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한 그가 60년 의사 생활에서 남긴 것은 1000만원이 든 통장 하나였어. 그는 그 통장까지 자신을 마지막으로 간호했던 간병인에게 전한다. 그리고 1995년 12월25일 세상을 떠났지.

그는 물론 특출한 인간이었고 의사를 넘어 모든 이의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야. 누구든 아픈 사람을 버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며 고통받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발동할 때 우리 모두는 장기려를 닮을 수 있고, 또 아무리 평범한 의사라도 장기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번 코로나19 사태 최초의 국내 확진 환자였던 중국 여성이 퇴원하며 남긴 메시지에서 또 한번 느낀 바야. “중국에는 ‘고쳐주는 사람에게는 어진 마음이 있다’는 뜻의 ‘의자인심(醫者仁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에게 당신들은 그 이상입니다. (중략) 당신 모두는 나에게 영웅이며 이 경험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 여생을 남을 돕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이런 선한 에너지가 모여 어쩌면 태양보다도 더 밝게 우리를 비추고 있는 것 아니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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