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고교 시절 여대는 기피 대상이었다. 교사들 역시 남녀공학을 가라고 권장했다. ‘연애는 대학 가서 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10대들에게 이성 연애가 발생할 확률이 낮은 공간은 마치 고등학교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여대에서는 술을 들이붓고 잔디밭에 토하는 대신 과일주스를 마시며 학교 행사를 진행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도 드물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니면 ‘일반적’ 기업의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2014년 뒤늦게 여대에 들어갔다. 사회에는 여대를 깎아내리는 통념도 있었으나, 여대에 대한 환상도 그에 못지않게 만연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타자화는 실제 존재를 왜곡하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우연히 목격한 ‘여대뷰’라는 조어는 그 환상 위에 만들어진 표현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뷰, 야경뷰, 오션뷰…. 사용자가 건물 내에 앉아 창밖으로 ‘좋은 것’을 내다볼 수 있을 때 ‘○○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밖에서 보는 여대는 여성이 스스로 여성 정체성과 그에 따라 부여된 기대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실천하는 집단으로 상상된다.

페미니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한편···

실제 경험은 달랐다. 부조리한 서열 관계나 우르르 몰려다니는 문화가 딱히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공간 안에서 여성임을 인지해야 하는 일이 적은 것이 놀라웠다. 단체원 모집 공고에 ‘여자 대환영’ ‘밥 잘 사주는 남자 선배 있음’ 같은 문구가 없었고, 성별에 따라 모임 내 역할에 제한을 두고 선발하는 일도 없었다. 과거 공과대학에서 느낀 막연한 소외감, 답답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던 내게 이런 경험은 완전히 새로웠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차별을 차별로 읽을 줄 아는 리터러시를 길렀다. 여대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늘 물 위에 떠도는 기름 한 방울 같은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내부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 대학 안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들은 그 나름대로 집단이 원하는 역할과 이미지에 부합하는 학생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은 정해져 있었다. 누군가가 한국 대학 내에서 외국어로 진행되는 교육과정을 무리 없이 따라갈 정도의 외국어 실력이 있다는 건 그 아래 숨겨진 많은 조건을 상상하게 했다.

특목고 출신, 특목고 진학을 가능하게 한 사교육 경험, 학군, 거주지, 또 부모의 경제력, 학력, 학벌, 집안…. 지방 출신에, 사교육을 받은 일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어 늘 이사를 다니고, 가난하고 학력이 낮고 번듯한 노동을 하지 않는 부모를 두었고, 늘 돈 걱정을 하고,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수업 스케줄보다 앞서 고려해야 했던 나는 쉽게 상상되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존재였다.

여대는 영원히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경험하고 떠나는 공간이었다. 경험은 자양분이 되었다. 여성 성별이 차별의 조건이 되지 않게 만들면 성별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차별 조건 하나를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들었을 때 그 안에서 또 어떤 차이들이 드러나고, 내적 갈등을 겪고도 그것을 편히 드러내지 못하는 존재는 어떤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도 경험했다.

내가 가장 크게 배운 점은 이것이다. 혼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회가 어떤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른 질서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 최초의 여대를 만들 때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그때껏 없던 질서를 세워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상상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나 역시 여대를 경험하며 얻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이전보다 더 나은 질서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

기자명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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