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펴냄

“돌고 돌아 내가 도착한 곳은 처음 출발한 곳, 아름다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것은 과학이 묻지 않는 물음이었다.”

책을 들추자 작은 종이첩이 발등으로 툭 떨어졌다. ‘책 사용설명서’였다. 표지 종이는 앙상블 엑스트라화이트 130그램, 본문 종이는 전주페이퍼 그린라이트 80그램 같은 책 기본 사양은 물론이고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배경지식이 담겼다. 편집자도 책을 만들면서 ‘향모’라는 식물을 처음 들어봤다는 친근한 고백도 곁들였다. 570쪽에 달하는 책 두께가 사용설명서를 읽는 동안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저자는 어린 시절 숲에서 경험했던 식물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에 이끌려 식물학자가 되었다. 과학이라는 증거와 논리의 세계 안에서도 끝내 닳지 않았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저자의 눈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그의 ‘뿌리’로 향한다.

 

 

 

 

 

 

 

 

 

 

근대 세계의 창조
로이 포터 지음, 최파일 옮김, 교유서가 펴냄

“계몽주의는 근대성의 형성에 결정적인 운동으로서 인정을, 때로는 악명을 얻었다.”

18세기 영국 지성사를 알기 위해 1000쪽 넘는 책을 읽어야 할까? 영국의 역사가가 쓴 이 책의 첫인상만 보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계몽’은 그리 인기 있는 주제도 아니다. 계몽주의는 기껏해야 엘리트들의 철 지난 자아도취로 여겨지거나, 더 나쁘게는 서구 백인 남성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가면으로 취급받는다.
이 야심찬 책에서 저자는 계몽의 복권을 시도한다. 계몽이란 체제를 타도하거나 전복하려는 혁명의 열정(18세기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시대다)을 넘어 체제를 창출하고 정당화하는 힘, 그러니까 지속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내는 힘이었다. 저자가 계몽을 ‘혁명에 대한 예방주사’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의미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메리 매콜리프 지음, 최애리 옮김, 현암사 펴냄

“이 무슨 피바다 잿더미인가! 애도하는 여인들의 무리인가!”

인류 역사상 예술과 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꽃핀 시기와 장소 중 하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파리다. 이 책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파리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과정(1871~1900년)을 그리고 있다. 예술가들의 면모가 눈부시다. 모네와 르누아르 등의 인상파 화가, 음악계에서는 드뷔시, 화강암이나 벽돌 같은 전통적 자재에서 벗어나 철로 다리와 건물을 설계하기 시작한 에펠, 문학계에서는 에밀 졸라…. 예술사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이 시기, 파리에 모인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당대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회심리학
로버트 치알디니 외 지음, 김아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사회심리학은 ‘지상 최대의 쇼’라기보다 놀랍고 논리적이며 유익하기까지 한 ‘지상 최대의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100년이 넘는 사회심리학 연구를 집대성한 이 책은 〈설득의 심리학〉 저자인 로버트 치알디니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 석좌교수가 같은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더글러스 켄릭(진화심리학 전문가), 스티븐 뉴버그(사회심리학 전문가)와 함께 쓴 사회심리학 개론서다. 827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벽돌책’이지만 자신과 타인 이해하기, 사랑과 낭만적 관계, 편견·고정관념·차별 등 흥미로운 주제로 가득하다. 심리학 내의 4가지 이론적 관점(사회 문화· 진화론·사회적 학습·사회적 인지의 관점)을 고루 반영했을 뿐 아니라 심리학의 다른 영역 및 유전학·경제학·동물행동학 등 관련 학문과의 연계도 염두에 둔 균형 잡힌 안내서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박찬효 지음, 책과함께 펴냄

“가족제도는 ‘환상’을 기반으로 운영되며, 여성혐오의 메커니즘도 상황에 따라 구축·재구축된다.”

여성은 때로 칭송받고, 때로 경멸당했다. 1990년대 중산층 전업주부는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맘충’으로 불리게 된다. 1990년대 취업주부는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현재는 ‘워킹맘’ ‘슈퍼맘’이라는 특수 지위를 부여받았다. 무엇이 여성의 위치를 이토록 가변적으로 만드나. 저자는 그 연결고리에 가족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말한다. 가부장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가족 윤리를 지탱하기 위해서 여성의 ‘바람직한’ 역할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했다. 이 책은 신문기사부터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 텍스트에서 여대생, 전업주부, 이혼녀가 시대별로 어떻게 ‘이미지화’되었는지 증거들을 모은다.

 

 

 

 

 

 

 

 

 

세습 중산층 사회
조귀동 지음, 생각의힘 펴냄

“20대의 세계관은 그들이 어떤 계층, 출신인지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청년 문제는 자주 세대 프레임을 통해 호명되곤 했다. 20대 내부의 다양한 정체성은 한순간 납작해졌다. 그 안에 ‘10과 90의 사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최근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논란에서 새롭게 드러났다. 저자는 기성세대로부터 착취당하는 N포 세대와 경제 고도성장의 수혜를 받은 G세대가 공존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격차를 만드는 것은 부모의 계층 혹은 계급이었다. 19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이전 세대와 어떻게 다를까. 이 책은 노동시장, 중산층, 계급의식, 정상가족 등을 키워드로 20대가 겪는 복합적인 불평등의 실체에 한 걸음 가까이 간다. 풍부한 데이터를 수집해 ‘세습 중산층’의 기원과 진화 양상을 분석한다. 뭉뚱그려졌던 1990년대생의 현실이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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