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농촌재단인린 생태농장에서 라오짜오 씨, 구얼라이 씨, 민 씨가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부터).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중국은 농민의 나라다. 샤오미와 알리바바의 나라가 아니다. 대장정의 중심에 섰던 농민 혁명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중국 이야기다. 2018년 국가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농촌인구는 7억9000만여 명에 달한다. 전체 인구 13억9500만여 명 가운데 절반을 훌쩍 넘는다.

중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자리 잡은 ‘농민공’ 역시 도시가 아니라 농촌 문제다. 호적은 농촌에 두고 있지만 도시에서 일하는 농민공 2억8800만여 명을 빼도 중국의 농촌인구는 5억명이 넘는다. 전체 인구의 36% 정도다. 2018년 한국의 농가인구 비율이 4.5%임을 감안하면 중국의 농촌인구 비중은 엄청나다.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중국에서도 여전히 농민의 위상은 낮지 않다. 이런 현실은 앞으로 중국 사회가 갈 방향을 가늠케 한다. “중국을 알고 싶으면 농촌을 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1호 문건’이라는 중요 자료가 있다. 중국 공산당이 그해 최우선 과제를 담아 연초에 발표하는 ‘신년 교시’다. 2003년부터 2019년까지 매해 어김없이 중국 공산당이 최우선 과제로 거론한 것이 있다. 바로 ‘삼농(三農)’ 문제다. 삼농이란 농민의 생계, 농촌의 지속가능성, 농업의 안정을 뜻한다. 2019년 1호 문건은 농촌 빈곤 탈피, 농촌 주거환경 개선, 농민 소득증대 등을 역점 과제로 삼았다.

개혁·개방 이후 공업화와 도시화로 질주하던 중국이 농촌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는 건 한국인에겐 낯선 이야기일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 언론은 미·중 패권 전쟁이나 미세먼지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중국 사회의 방향은 확고하다. 후진타오 시대에는 ‘신(新)농촌 건설’, 시진핑 시대에는 ‘향촌 진흥’이라고 명명한 ‘농촌 살리기’다.

민간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신향촌 건설운동’이라 불리는 청년들의 귀농·귀촌 운동이다. 1920~30년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기치로 추진됐던 향촌 건설운동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중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도시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꿈꾼다. 이 또한 해외 언론에는 잘 소개되지 않았다.

〈시사IN〉은 2019년 11월22일부터 12월2일까지 대산농촌재단 해외연수단과 함께 변화하는 중국과 타이완의 농촌 현장을 찾았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과 활동가, 전문가 등 19명이 참여했다. 농업 지원 공익재단인 대산농촌재단은 1992년 농업 연수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래 70차례 넘게 해외 농촌을 방문했다. 

ⓒ대산농촌재단치시 생활농장 대표이자 수미 생태학교 공동설립자인 하오관후이 씨.

‘바링허우 세대’의 성찰

광둥성 광저우시는 베이징·상하이와 함께 중국 3대 도시다. 1500만 인구가 밀집한 도시 중심가에서 1시간이면 닿는 곳에 ‘인린(銀林) 생태농장’이 있다. 화난(華南) 농업대학 출신 동문 3명이 주주가 되어 설립한 농장이다. 농장주는 1981년 이 지역에서 태어난 구얼라이 씨.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아홉 살 때인 2009년부터 토지사용권을 임차해 농사를 짓고 있다.

중국 농업을 알려면 토지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도시 토지의 경우 국가 소유이고, 농지는 쉽게 말해 마을 소유다. 선거를 통해 뽑는 촌민위원회가 농지를 관리한다. 농민은 ‘토지사용권’을 갖되, 이를 30년씩 남에게 빌려줄 수 있다. 구얼라이 씨 역시 아버지에게 토지사용권을 물려받고, 주변 농민으로부터 농지를 빌려 모두 70무(1무=200평·약 660㎡) 규모의 농사를 짓는다.

인린 생태농장에는 농약도, 화학비료도, 살충제도 없다. 대신 한약재를 이용한 퇴비, 바이오다이내믹(생명역동) 농법에 기초한 녹비(녹색 작물로 만든 퇴비) 등을 사용한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내에서도 유기농 기술로 인정받고 있지만, 귀농한 젊은이들이 처음부터 유기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첫해와 이듬해는 남들 하는 대로 관행농(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농사법)으로 작업했다. 그러다 돼지를 키우면서 2013년부터 돼지 분변을 퇴비로 쓰기 시작했다. 유기농으로 첫발을 떼며 다양한 시도가 뒤따랐다.

인린 생태농장에는 밭마다 노란 끈끈이가 보초처럼 서 있다. 살충제 대신 끈끈이로 해충을 잡는다. 자잘한 잡초는 뽑지도 않는다. 잡초 뿌리에서 오히려 토양에 좋은 미생물이 자라기 때문이다. 한약재 퇴비는 해마다 200평마다 5t 정도씩 뿌려준다. 토양 산성도 조사 결과 한약재 퇴비의 토양 개선 효과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농장은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사탕수수·브로콜리·배추·바나나·파파야 등이 한데 어울려 자라며 토양을 더 건강하게 한다. 농장에 있는 연못은 물고기를 키우는 양어장인 동시에 밭에 물을 대는 저수지다.

농장에서 키운 작물은 워투궁팡(沃土工坊)에서 판매된다. 워투궁팡은 귀농인과 소농의 생태농업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워투궁팡에서 들어오는 돈이 농장의 중요한 운영자금이다. 농장 살림을 총괄하는 라오짜오 씨는 현재 수입과 지출이 딱 맞아떨어지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이 농장은 광둥성 지역 농민과 귀농·귀촌을 꿈꾸는 이들의 교육장으로도 사용된다. 그동안 농장에서 워크숍이 30여 차례 열렸는데, 800여 명이 참여했다. ‘농장 인턴’ 제도를 만들어 젊은이의 참여도 꾀한다.

연수단이 방문한 날도 한 청년이 농업용 장화를 신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1989년생인 민 씨는 상하이에서 살다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학을 다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에 농촌문제와 유기농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WWOOF(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농가에서 숙식하며 일하는 것)’ 활동을 체험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기농법을 배워 농사를 지을 계획이라고 했다.

일부 첨단산업 분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경제대국 중국에서 왜 구얼라이 씨나 민 씨처럼 젊은이들의 농촌행이 잇따르는 걸까. 라오짜오 씨가 말했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대도시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그런 이들이 자연스럽게 농촌을 제2의 삶터로 여기고 있다.” 딱히 큰 이문을 남기지도 못하면서도 농장을 10년이나 끌어온 원동력에 대해 라오짜오 씨는 “비록 느리더라도 중국 농촌이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이 즐겁다”라고 말했다.

도시화에 염증을 느낀 청년들은 집단으로 움직이며 한 마을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광저우 남쪽 중산시에 있는 ‘치시(旗溪) 생활농장’은 중국 신세대가 주도하는 생태주의 귀농운동의 현황을 앞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농장에 서면 고층아파트 단지가 한눈에 보일 만큼 도시와 가깝다.

농장 주변 마을에는 토박이 주민과 함께 도시에서 이주한 청년들이 생활한다. 이들은 농사를 짓고 생태주의를 학습한다. 청년들에게 유기농 기술을 가르치고 관련 잡지도 발행한다. 2017년 귀농청년대회에는 120여 명이 참여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귀농 플랫폼이자 인재 양성소다.

마을 내 ‘수미(舒米) 생태학교’는 배움의 공간이다. 대안 생태학교로 이름난 영국 슈마허 칼리지에서 공부한 청년들이 그 교육 이념을 전파하고자 문을 열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2018년 8월 개교한 이 학교에서는 맥주 만들기, 공예 교육, 미니멀리즘 교육 등이 이루어진다. 2~3일짜리 워크숍도 있고, 9주짜리 장기 생태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Soil, Soul, Society(흙, 영혼, 사회)’를 철학으로 유기농부터 경제학까지 가르친다.

ⓒ시사IN 이오성치시 생활농장과 수미 생태학교는 음식을 통해 사람과 땅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치시 생활농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음식이었다. 화이트와인(생강차)과 레드와인(로젤차)으로 시작한 점식 식사는 단연 이번 연수 기간 중 최고였다. 조와 퀴노아 등으로 지은 잡곡밥, 강황 커리, 토마토 스튜, 가지와 고구마 구이, 강황 빵으로 이어지는 식사에 연수단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동백 열매 가루로 만든 친환경 세제로 스스로 설거지까지 마치면서 한 끼니가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음식을 통해 사람과 땅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농장과 학교의 목표다.

치시 생활농장이 있는 마을은 과거 무분별한 관행농으로 인해 토지·환경 오염이 심각한 곳이었다. 이후 젊은 청년들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생태농업을 실천하려는 농부, 도시를 떠나 살고자 하는 예술가, 채식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이들, 발도르프 교육 같은 대안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가 이곳으로 모였다. 모두 ‘삶의 전환’을 꿈꾸는 이들이다.

치시 생활농장 대표이자 수미 생태학교 공동설립자인 하오관후이 씨 역시 1980년대생이다. 하오관후이처럼 19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을 ‘바링허우(八零後)’ 세대라 부른다. 덩샤오핑의 ‘한 가구 한 자녀’ 정책 이후 태어난 세대로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자란 이들이다. 이 세대를 흔히 ‘소황제’ 또는 ‘소공주’라며 비꼬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이들 세대는 중국 인구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 바링허우 세대가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신향촌 건설운동을 이끌고 있다. 바링허우 세대는 도시화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상당수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중국 농촌은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먹고살 만했던 농촌에 대한 향수를 지닌 동시에 1990년대 이후 공업화로 농촌인구가 빠져나가면서 급속히 쇠락하는 ‘고향’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농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당시 중국 전역의 대학에서 한국의 ‘농활’ 같은 농촌 교류 움직임이 일면서 ‘반향청년(返鄕靑年)’이라 불리는 귀농 청년들이 생겨났다.

ⓒ대산농촌재단푸젠성 룽옌시에 있는 페이톈 마을. 신향촌 건설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변화했다.

시진핑의 국가전략 ‘향촌진흥’

반향청년들은 삼농 문제 최고 권위자이자 활동가인 원톄쥔 중국 런민대학 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원톄쥔 교수는 저서 〈백년의 급진〉을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학자다. 그는 서구식 경제발전 모델의 파산을 선언하고, 중국처럼 식민지를 가지지 못했던 나라는 소농 중심 경제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설파해 아시아 전체에 큰 울림을 주었다.

청년들은 2003년 허베이성에 설립된 ‘옌양추 농민학교’ 등 귀농 교육단체에서 교육을 받고 농촌으로 스며들었다. 하오관후이 대표 역시 옌양추 농민학교 출신이다. 이들은 중국의 유기농과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농가와 소비자가 직접 계약을 맺고 농산물을 재배하는 공동체 지원 농업)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바링허우 세대 사이에서는 자녀를 농촌에서 공부시키는 ‘농촌 유학’ 프로그램도 인기를 끈다. 푸젠성 룽옌시에 ‘페이톈(培田)’이라는 마을이 있다. 800년 역사를 지닌, 주민 1700명이 사는 하카(客家) 마을이다. ‘하카’란 전쟁 등 재난을 피해 북방에서 남쪽 푸젠성과 광둥성 등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말한다. 하카 문화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아름다운 이 시골 마을은 ‘농촌 스테이’로 이름난 곳이다. 도시 가족들이 마을에서 먹고 자며 수공예 등 여러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페이톈 마을도 과거에는 쇠락하는 농촌 마을이었다. 2009년경 신향촌 건설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살아났다. 운동의 1단계는 마을 주민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마을 서원에서 먹고 자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환경보호 활동을 펼치며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2단계는 주민 활동가를 발굴하는 일이었다. 유서 깊은 마을에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수공예 장인들이 많았다. 3단계는 주민 스스로 마을의 주체가 되는 일이다.

2011년 마을에 만들어진 ‘노인 공익식당’이 딱 그런 곳이다. 당시 청년들이 혼자 사는 노인들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동안 운영했다. 이후 주민들이 이어받아 지금껏 재료 수급부터 요리까지 자체 운영하고 있다. 한 끼에 2.5위안(약 420원)을 내고 40여 명이 점심과 저녁을 이곳에서 해결한다.

‘쯔농(滋農) 유학’은 이런 경험을 토대로 2014년 설립한 사회적 기업이다. 아이들을 위한 자연교육, 성인을 위한 농촌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마을 내 마이크로크레디트(서민을 위한 무담보 대출) 설립과 지역 농산물 판매 및 가공을 지원하기도 했다. 쯔농 유학 부대표를 맡고 있는 장리리 씨는 1987년생으로, 2009년경부터 페이톈 마을에서 신향촌 건설운동에 참여했다(59쪽 상자 기사 참조). 쯔농 유학은 현재 항저우 등에서도 마을 스테이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중국에서 귀농·귀촌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2018년 전국 300여 개 현을 조사해 고향으로 돌아온 창업 농민공 숫자가 740만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현마다 인구 편차가 크지만, 중국 전체에서 농촌지역 현은 어림잡아 1800개 정도다. 여기에 치시 생활농장의 경우처럼 도시에서 태어나 귀농한 이들까지 더하면 수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중국 공산당 차원에서도 ‘21세기 버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상산하향은 마오쩌둥 시기 도시 지식청년을 농촌으로 보낸 운동이다. ‘하방(下放)’이라 부르기도 했다. 공산당 청년 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1000만 대학생 등을 농촌으로 보내는 ‘삼하향(三下鄕)’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대졸 청년의 귀농 창업 지원 등이 핵심 정책이다.

이런 계획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강조해온 ‘향촌진흥’의 일환이다. 도시 지역의 취업난을 해소하면서 농촌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전략이다.

시진핑은 2002년 칭화대학에서 49세 나이에 ‘중국 농촌 시장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진핑은 청소년 시절부터 산시성 농촌에 7년간 ‘하방’되어 농촌 현실을 체험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베이징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책을 마다하고 허베이성 농촌 지역의 당 서기로 일하는 등 농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가주석에 오른 뒤, 시진핑은 지속적으로 농촌문제를 살폈다. 2015년 3월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공식화한 ‘생태문명’ 추진이 그것이다. 환경오염과 빈곤으로 망가진 농촌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다. 시진핑이 2005년 저장성 당 서기를 지내던 시절 직접 만든 표어인 ‘녹수청산 금산은산(깨끗한 자연환경이 금이고 은이다)’은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시진핑의 국가 전략이 밖으로 ‘일대일로’라면 안으로는 ‘향촌진흥’과 ‘생태문명’인 셈이다.

이번 연수에 동행한 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시진핑의 ‘중국몽’ 실현은 결국 삼농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중국이 강하려면 농업이 강해야 하고, 중국이 아름다우려면 농촌이 아름다워야 하고, 중국이 잘살고자 하면 농민이 잘살아야 한다는 게 시진핑 삼농 사상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동병상련, 동아시아의 농촌 현실

이번 연수의 주제는 ‘협동과 연대로 전환하는 동아시아의 농(農)’이었다. 광저우시 선징(深井) 마을에서 열린 토론회는 이에 걸맞은 행사였다. 연수단과 중국 신향촌 건설 활동가 등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뜻밖의 상황이 연출됐다. 중국의 신향촌 건설운동이 주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농촌 상황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경남 진주의 진주텃밭 협동조합 도상헌 총무팀장, 슬로우푸드문화원장 김원일씨, 괴산 눈비산마을 사무국장 배대우씨, 한살림 전경진씨, 청양 나눔영농조합법인 박영숙씨 등이 사례 발표를 할 때마다 중국 활동가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인린 생태농장의 라오짜오 씨는 도상헌 진주텃밭 총무팀장에게 생산자가 농산물 가격을 정하고 이 중 13%만 운영수수료로 책정해 진주텃밭을 운영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물었다. 둘은 스마트폰 번역기를 사이에 놓고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선징 마을의 한 사원에서 3시간을 훌쩍 넘긴 토론회는 해가 넘어가도록 끝날 줄 몰랐다. 중국 참가자들은 한국의 사례 발표를 계속 듣고 싶어 했다. 질문도 계속 이어졌다. “농촌에 침투한 자본에 농민들이 쉽게 투항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학사상이 한국의 농촌에 미치는 영향이 있나” “거대한 협동조합은 대기업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중국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다. 한국 활동가들이 매일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동아시아 국가는 서로 많이 닮았다. 농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규모 기업농 위주인 서구와 달리 소농 기반 농업구조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다. 식량을 담보로 한 무역전쟁 시대에 농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점도 동병상련이다. 그럼에도 양국의 농민들은 서로를 몰랐다. 중국,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의 농촌문제는 관심 밖이었고 민간 차원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중국산 농산물’에 대한 공포만 있었다.

중국 현지에서 발견한 것은 대단한 성공 사례나 해법이 아니었다. 일부 사례는 한국에서도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시행착오를 겪은 것들이다. 가장 뜻깊은 발견은 농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존재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확인했다는 점이다. 서구가 제시하지 못하는 농업의 미래가, 어쩌면 동아시아에 있는지도 모른다.

 취재도움:김유익 화&동 청춘초당 대표

 

 

여기가 정말 선전 맞아?

ⓒ시사IN 이오성

광둥성 선전시는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린다. IT, 전자 등 첨단산업의 집결지다. 우퉁다오(梧桐島)는 선전공항 인근에 있는 오피스 단지다(사진). IT 스타트업 기업 등이 입주했다. 이곳에 가면 진기한 구경을 할 수 있다. 우선 단지 내 큰 연못이 있다. 빗물을 저장해 조성한 인공 연못이다. 건물 주변에는 닭, 오리, 공작, 토끼, 다람쥐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닌다.

각 건물 옥상은 친환경 농장이다. 바나나, 백향과, 갓 등이 자란다. 입주 직원이 키워 먹거나 단지 내 유치원에 기증하기도 한다. 함께 기르는 닭의 분뇨는 퇴비로 쓴다. 단지 내 정체불명의 파란색 통은 낙엽 등을 모아 만든 퇴비 저장고다.

단지가 조성된 지는 6년쯤 됐다. 모두 24개 동인데, 각 건물에 ‘춘분’ ‘추분’ 등 24절기 이름을 붙였다. 농업과 생태에 관심 있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단지를 조성했다. 임차료가 비싼 편이지만 공실률이 1%밖에 안 된다. 단지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지역 농민들이 참여하는 파머스 마켓(농산물 직판장)도 열린다. 100여 개 점포가 참여하는데 매번 1만명씩 몰린다. 한국으로 치면 판교 같은 곳에 1만명이 운집하는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셈이다. 농업이 건축과 만나 어떻게 도시를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독특한 장소다.

 

 

“해법은 농촌에 있다”

ⓒ시사IN 이오성

둘은 부부다. 장치 씨(왼쪽)는 쯔농 유학 대표, 장리리 씨(오른쪽)는 부대표를 맡고 있다. 쯔농 유학은 ‘향촌의 아름다운 재발견’을 슬로건으로 농촌 체험활동을 진행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바링허우 세대인 부부는 푸젠성 신향촌 건설운동 과정에서 만나 마음이 맞아 2016년 11월11일 광군제 때 결혼했다.

 

중국의 신세대 부모가 자녀의 농촌 유학에 적극적이라니 뜻밖이다.

바링허우 세대는 농촌에서 자랐다. 이들은 자녀가 농촌에서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교육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 전교생이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교도 있다.

청년들의 귀농·귀촌이 뚜렷한 사회적 현상인가?

물론 크게 보면 여전히 도시화와 공업화가 중국 사회의 주류다. 하지만 농민공의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농촌이 주목받고 있다. 도시는 이미 생산 과잉과 노동력 공급 과잉에 접어들었고, 이걸 해결할 방책이 없다. 과거엔 지식인과 학생 위주였다면 이제 보통 청년들도 농촌에 관심을 가지는 추세다.

중국 정부의 향촌진흥 정책이 농촌 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2017년 19차 당 대회 이후 중국 사회의 최대 역점 사업이다. 환경정비와 녹화사업에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푸젠성의 경우 마을 단위마다 1500만 위안(약 25억원), 시진핑 주석이 당 서기를 지냈던 저장성의 경우 마을마다 3000만 위안(약 50억원)까지 투자가 이뤄졌다. 일부 시범지역은 억대 단위로 투자되기도 했다. 지금 중국 농촌은 경천동지하고 있다.

정부와 민간 사이에 협력은 잘 되나?

시진핑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시진핑 이전엔 민간 위주였다면 이후엔 정부의 역할이 커졌다. 정부가 신향촌 건설운동의 많은 구호를 받아들였다. 해가 갈수록 훨씬 환경이 나아지고 있다.

도시에서 성공하는 삶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그런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처음엔 후회한 적도 있다. 혹시 내가 도시의 경쟁에서 도피하려고 농촌운동을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나 자신이 변증법적 정반합 과정을 통해 발전해나간다고 생각한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인가?

돈이 문제가 아니다. 농민을 조직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농촌에서 리더로 성장할 만한 사람을 발굴하면 나중에 도시로 돈 벌러 나가버린다. 농민들은 여전히 농촌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한다. 우리더러 고생한다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언제 보람을 느끼나?

페이톈 마을 만들기 사업이 농민들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기뻤다. 농촌에 정착했다는 느낌이랄까. 농촌 사람들이 스스로 농촌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점이 뿌듯하다. 아 참, 뜻이 맞는 동반자를 만나서 결혼한 게 가장 즐겁다(웃음).

기자명 푸젠·광둥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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