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글라이딩 사고로 북한에 불시착한 재벌 후계자가 북한 총정치국장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가 화제다. 로맨스가 펼쳐지는 공간은 북한이다. 일각에서 ‘북한 미화’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해당 드라마의 감독은 북한을 “로맨스를 할 수 있는 단절된 공간”, 즉 ‘판타지’로만 봐달라고 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또는 ‘판타지’로만 보기에 북한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구체적인 현실이다. 북한의 노동자는 자유롭게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 사용자로부터 직접 임금을 받지도 않는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다. 세금도 내지 않는다(건물 이용권과 준조세적 성격의 부담금 따위가 있기는 하다). 부동산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부동산등기 제도 역시 없다. 법인세가 없으므로 세무·회계 시스템도 필요치 않다. 당연히 관련 법규가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하다.

부동산 가격, 투기, 연봉 협상, 임금 체불, 실업, 증세와 세금 감면, 탈세, 회계 비리, 주가조작 등 남한의 첨예한 사회적 문제들이 ‘평범한’ 북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이처럼 경제적 차원에서 들여다보면, 북한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의 구체적 풍경은 남한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시사IN 조남진

4년이 다 되도록 굳게 닫혀 있는 개성공단은 오히려 북한 내부에서 ‘판타지’적 공간이었다. 남한의 기업들이 북에서 사업을 하려면, 북한으로부터 단순히 공장 부지와 노동을 제공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개성공단에서는 사실상의 부동산 소유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부동산을 측량해 지적도와 등기부를 만들었다. 기업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분쟁 해결 방안과 강제집행 제도(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의 재산을 법원이 강제 압류 및 매각) 등이 도입되었다. 법인세를 징수하고 탈세를 막기 위해 납세 시스템을 만들고,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회계까지 시행되었다. 모두 시장경제의 근간이 되는 핵심 제도이다.

북한 당국은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한도 내에서 변형을 가하기는 했지만, 개성공단에 시장경제 요소들이 들어와 자리 잡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계속된 국제사회의 제재 아래서 빈곤으로부터 탈출해 경제개발을 이루려면 특수 관계에 있는 한국과의 협력이 절실했을 것이다.

개성공단은 한국 주도로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역사적 실험 공간이었다. 개성공단은 단계적으로 더 확대될 예정이었다. 경제특구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시장경제를 실험한 뒤 이를 단계적으로 전국에 확산하는 중국의 ‘점→선→면’ 발전 전략을 북한도 따라가고 있었다. 시장경제의 핵심 요소들이 북한 전역으로 퍼져나갈 터였다.

기업들의 헌법소원에 3년 넘게 침묵하는 헌법재판소

개성공단을 남한의 한계기업들이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에 기대 생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만 소비하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이 경제 제재를 피해 외화벌이를 하는 공간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개성공단은 단순한 남북 경제협력 차원을 넘어 북한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다수의 통상협정에서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토록 애쓴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개성공단의 운영 구조상 기업이 북한 측에 지급한 임금이 핵무기 개발에 쓰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이를 문제 삼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죄가 크다. 전면 중단의 위헌성을 확인해달라는 개성공단 기업들의 헌법소원에 3년 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는 헌법재판소도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개성공단을 재개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현 정부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신년사에서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노력도 계속해갈 것”이라고 했다. 하루빨리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 바란다. 열려라, 개성공단!

기자명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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