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정호화씨(사진)의 아버지 정기영씨는 석유를 사러 갔다가 공수부대의 진압 과정에서 행방불명됐다.

“누구든 5·18 행방불명자(행불자)와 아픔을 나눌 순 있어도 그 한을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에 사는 정호화씨(48)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80년 5월20일 오후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 정기영씨(당시 43세)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에서 어머니와 ‘왕대포집’을 운영했다. 마침 그날 가게 음식 조리용 석유곤로에 기름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아들 호화가 뒷자리에 태워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석유를 사온 뒤 태워주마” 하고 아들을 달랜 뒤 집주인 아저씨와 함께 집에서 200m 거리에 있던 주유소로 향했다.

주유소에서 기름 한 통을 받아 자전거에 싣고 되돌아오던 정씨 일행은 5·18 시위대와 만났다. 길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지켜보던 찰나, 무장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급습했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 속에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녁 늦게 집주인 아저씨 혼자 돌아왔다.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뒤엉키며 아버지와 헤어져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도 곧 돌아오겠거니 기다렸지만 소식은 없고 밤새 총소리만 무섭게 울렸다.”

행방불명 이후 38년간 인정 못 받아

이튿날까지 기다려도 아버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호화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집 근처 대로변에 수시로 나가보았다. 수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지나가는 차량 시위대를 응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서 일시 철수한 뒤인 5월22일부터 어머니 최정자씨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최씨는 집주인과 함께 사망자 시신이 임시로 안치된 도청 앞 상무관을 매일 들러 확인했다. 외삼촌은 시내 기독병원 영안실도 날마다 뒤졌다. 아버지 행적에 관한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시사IN 조남진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부지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 40여 구가 발견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정씨 가족은 억울함을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한 채 숨죽여 살아야 했다. 최정자씨는 아들 호화와 딸 등 남매를 혼자 키우며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유골이나 시신을 확인하기 전까지 남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최씨는 5·18이면 해마다 남편 제사는 지냈지만 아직까지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정호화씨는 30대 시절부터 광주와 서울 곳곳을 돌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아버지를 5·18 행불자로 인정하는 데 인색한 담당 공무원들 때문이었다. 정씨 가족은 1979년까지 서울에서 살다 1980년 2월 광주 외가 근처로 이사 왔다. 5·18 민주화운동 기간 광주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직접 아버지의 원적지인 서울의 동사무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버지가 5·18 이전에 서울에서 광주 중흥동으로 이사해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는 증거를 찾아내 제출해야 했다.”

1995년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제정된 뒤 광주시와 관할 경찰서에서는 5·18 당시 정기영씨가 행방불명된 과정을 조사했다. 가족뿐 아니라 집주인, 동네 주민 등 주변인까지 면담했다. 조사 당시 적극적인 태도와 달리 담당 공무원들은 조사 뒤 미온적이었다. 정호화씨는 어머니와 함께 담당 공무원들을 찾아다니며 행불자로 인정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모두 ‘퇴직한 뒤에 도와주겠노라’며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2002년부터 5·18 행불자 심사에서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6차례 기각됐다. 2018년 여름 7차 심사에서야 정식으로 5·18 행불자 가족으로 인정받았다. ‘공무원들의 허위 왜곡으로 인한 누락’이 인정 사유였다.

“1980년 행방불명된 이후 2018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 무려 38년이다.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단서를 쥔 분이 구청 근무자였는데, 퇴직하고 관련 자료를 주겠다 해서 기다렸는데 막상 퇴직하니 고심하더라. 당시 상부에서 가급적 행불자 숫자를 줄이라고 해서 누락해버렸다고 했다. 또 담당 경찰관도 우리 아버지를 행불자로 판단하고 조사보고서를 올렸는데 위에서 빼라고 했다고 양심고백 해줬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광주 지역 공무원들조차 5·18 행불자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심사에서 제외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시사IN 조남진2017년 11월10일 5.18 기념재단 관계자 등이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인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 인근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5·18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정호화씨는 긴긴 세월 진실을 밝히려 뛰어다니는 사이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정씨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5·18 행불자 가족 중에 자기 같은 억울한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인정 행불자 대다수는 5·18 직후 가족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5·18 관련 객관성 결여’ 판정을 받았다. “당시 행불자 가족들은 혹시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먹고살기 바빠서 바로 실종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 학살 가해자가 서슬 퍼렇게 집권한 시기라 무슨 후환을 당할지 두려워 나중에 신고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지난해 신원 미상 유골 40여 구 발견

현재 광주시와 5·18 단체 등에 따르면 행불자로 신고된 이들은 448명이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5·18 행불자는 84명이다. 2001년 5·18 묘역의 무명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6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나머지 78명은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했다. 이들은 국립 5·18 민주묘지 행방불명자 묘역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20일 광주교도소 부지 무연분묘에서 신원 미상 유골 40여 구가 발견됐다. 이곳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 유골이 5·18 당시 암매장된 행방불명자의 것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정호화씨를 비롯한 행불자 가족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당시 3공수여단 관할 진압 지역이 광주교도소부터 대인동시장까지였으니 우리 아버지 유골이 혹시 거기서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행불자 유골이더라도 이번에는 꼭 밝혀졌으면 좋겠다.”

이번에 신원 미상 유골이 발견된 부지는 2017~2018년 5·18 기념재단의 발굴 대상지에서 제외된 곳이다. 5·18 기념재단은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과 철책 사이, 북동·남서쪽 담장 등을 유력한 암매장 후보지로 꼽고 3개월 동안 발굴 조사했다. 당시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성과 없이 2년이 흐르면서 행불자 찾기는 잊혀갔다. 5·18 기념재단 측은 이에 대해 “광주교도소 내 암매장 의혹을 확인하기 위한 발굴 조사가 단 3개월에 그친 이유는 정부 차원의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규명위) 출범으로 발굴 작업이 확대되길 기대했고, 기념재단 차원의 조사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5·18 진상규명위 출범으로 암매장 의혹을 확인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호화씨도 국가 차원의 암매장 추정지 발굴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한다고 전했다. “5·18 당시 투입된 군인한테 극락강 다리라든지 광주 외곽 특정 야산에 묻었다는 제보가 들어오지만 행불자 가족들은 시에서 허락을 안 해줘 못 판다. 또 발굴 작업에 엄청난 인력과 예산이 들어가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껏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고작 광주시내 재개발 공사장 같은 데서 유골이 나오면 달려가는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미인정 5·18 행불자 가족들도 고령으로 사망자가 늘고 있다. 이제 남은 유일한 증거는 앞으로 5·18 진상규명위가 국가적 차원에서 발굴해야 할 유골뿐이다. 하지만 행불자 가족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정보수집 작업은 불충분하다. 광주시는 전남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 용역을 맡겨 2000년부터 2009년까지 4차례에 걸쳐 5·18 행불자로 신고된 124명의 가족 299명의 혈액을 확보했다. 정호화씨는 말했다. “광주교도소에서 발굴된 유골이 5·18 관련자로 밝혀진다면 이번에야말로 미인정 행방불명자 가족 전원에 대해 DNA를 채취할 기회를 줘야 한다. 행불자 가족에게 유골은 단순한 시신이 아니다. 계엄군 군홧발에 짓밟혀 가족을 잃고도 나라에서 버림받은 한 맺힌 세월을 입증할 유일한 증거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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