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에 담긴 노동
  • 고제규 편집국장
  • 호수 641
  • 승인 2019.12.2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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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3롤, 노동. 지난여름 사진가들에게 ‘올해의 사진’ 기획을 제안했다. 예년과 달리 조건을 달았다. 필름 작업. 찍고 확인하고 바로 삭제하는 디지털 시대에 구닥다리 요청을 했다. 의외로 사진가들이 호응했다. 필름은 당장 어떤 장면을 포착했는지 알 수 없다. 현상을 거쳐야 한다. 필름 3롤. 장수도 제한했다. 한 장 한 장에 담긴 찰나는 사유의 시간이다. 사진가들의 사유까지 지면에 담으려 했다. 노동. 필름 3롤이라는 유한의 형식에 무한의 콘텐츠를 담았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노동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시인, 작가들이 의미를 보탰다. 2019년 송년호는 표지부터 모두 필름카메라로 노동이라는 단일 주제를 담았다.

올 한 해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매일 기록하는 동안 청소 노동자 서기화씨는 서울대병원으로 출근했다. 서규섭씨는 농토를 갈았다. 해고된 지 15년 만에 복직한 정용진씨는 일터에 해바라기씨를 뿌렸다. 서덕립씨는 콘크리트 외부 마감을, 채경표씨는 페인트칠을 했다. 또 누구는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가사노동을 했다. 다행히 이들은 매일 출근하고 매일 퇴근했다.

‘퇴근하지 못한’ 아들 용균씨를 둔 엄마 김미숙씨는 슬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자신도 노동자인 그는 사회운동가가 되어 싸웠다. 엄마·노동자·사회운동가 김씨와 수많은 김용균들이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적으로 바꿨다. 개정안이 새해 1월16일부터 시행된다. 김미숙씨와 김용균들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특성화고 학생의 산재를 다룬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쓴 은유 작가가 인터뷰어로 나섰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이 노동자다. 나 역시 노동자다. 아마 우리 자녀들도 노동자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노동자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기를, 적어도 일터로 나간 노동자들이 모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한 해 〈시사IN〉을 애독해준 독자 여러분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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