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소식을 듣고 단번에 기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올해의 출판사’나 ‘올해의 루키 출판사’ 분야가 특히 그렇다. 버티느라 여념이 없고,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갸웃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시사IN〉이 출판인들에게 설문을 시작한 지 10여 년. ‘최고’를 가리기보다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분투한 출판인들을 응원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동료들이 꼽은 올해의 책, 저자, 출판사 등을 소개한다. 올해도 아래의 출판사 관계자 74명이 응답해주었다. 

 

설문에 응해준 출판사(가나다순)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가나출판사, 글항아리, 김영사, 꿈꾼문고, 낮은산, 눌와, 다산북스, 도서출판 개마고원, 도서출판 아시아, 돌베개, 동녘, 동양북스, 루아크, 마음산책, 메디치미디어, 메멘토, 문예출판사, 문학동네, 민음사, 바다출판사, 바이오스펙테이터, 반비, 북극곰, 북콤마, 비채, 뿌리와이파리, 사계절, 사월의책, 사이행성, 서해문집, 시사IN북, 아작, 어떤책, 어크로스, 열린책들, 오마이북, 웅진지식하우스, 워크룸 프레스, 웨일북, 위고, 유유, 이매진, 이프북스, 인디페이퍼, 인물과사상사, 제철소, 창비, 코난북스, 페이퍼로드, 푸른숲, 프시케의숲, 한겨레출판, 한권의책, 항해, 현암사, 호밀밭, 흐름출판

 

 

 

 

2019년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은 단연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평범한 우리 모두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책은 지난 7월 출간된 이후 입소문을 타고 두 달 만에 2만5000부를 돌파했고, 12월 기준 약 4만 권이 출고됐다. 각종 혐오 표현, 노키즈존, 차별금지법 등 한국 사회의 혐오와 차별 이슈를 담고 있다. 소수자와 인권, 차별에 대해 가르치고 연구하는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다문화학과)는 ‘올해의 저자’로도 꼽혔다. 그의 첫 번째 책이다. 편집자들이 많이 추천한 국내서 12권 가운데 5권이 저자의 첫 책이다.

설문에 응한 출판인들에 따르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개인의 선의를 다시 한번 곱씹게 하는 책이다. ‘차별이라고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차별을 일깨웠던 시의적절한 도서’이자 ‘하루에도 몇 번씩 차별과 혐오를 저지르고, 그게 혐오 표현이라고 지적하면 낯을 붉히며 화를 낼 모든 알량한 지식인들을 위한 책’이다.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는 ‘우리 사회에 좀 더 많은 혐오 표현 사전이 필요하고 이 책이 그 출발점’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국내서 12권 중에는 에세이와 소설, 그리고 여성 작가의 약진이 눈에 띈다. 에세이 분야에선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편집자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박막례 할머니와 손녀 김유라 PD는 유튜버의 파워를 실감하게 하면서도 ‘여성 노인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지은 푸른숲 과장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늙음을 미워하지 않는 ‘코리아 그랜마’의 말과 편견 없는 시선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연륜이란 흐르는 시간으로 쌓아올린 통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책에는 박막례 할머니의 삶과 인생이 ‘뒤집힌’ 유튜버로서의 경험이 담겨 있다.

한국 순문학을 뒤흔든 한국형 SF 등장

4인 가족이 기준인 세상에서 두 싱글 여성이 동거를 결심하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담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가능하다는 걸 일깨워주었다. 출판편집자들은 ‘결혼 없이도, 이성이 아니어도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선언적인 책’이며 ‘비혼 여성이라는 한정을 두지 않더라도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국내서 12권 중 소설이 4권이고 그중 2권이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등단부터 단행본까지, ‘빛의 속도’라는 공통점도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김초엽 작가는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받으며 주목받았다. 과학도 출신인 이 신인의 등장은 출판계에 어떤 의미였을까. 한 편집자는 ‘한국 순문학을 뒤흔든 한국형 SF의 등장’으로 그 표현을 대신했다. 역시 지난해 ‘창작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한 장류진 소설가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20~30대 직장인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등단작은 공개되자마자 SNS를 통해 확산되며 화제가 되었다.

한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은 ‘올해 나온 소설들의 전조’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 당시의 촛불혁명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 두 편을 엮었다. ‘남성 소설가들의 활동이 유난히 부진했던 올해, 유일하게 빛난’ 박상영 작가도 있다. 그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발견’으로 기억되었다.

주목받지 못한 이들의 삶을 밀착해 기록한 두 책도 출판계의 관심을 받았다.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장시간 노동과 사내 폭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장실습생 김동준 군의 죽음을 다룬다. 유가족, 노무사, 직업계고(특성화고·마이스터고 등) 재학생과 졸업생의 음성을 담았다. ‘사회가 전과 달라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드러내는 책’이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다. 강설애 낮은산 편집자는 “개인의 서사가 환영받는 시대에 타인의, 그것도 깊숙이 가려져 있는 십 대 노동자의 현실에 귀 기울인 책이어서 더욱 귀하고 고맙다”라고 말했다.

〈삼순이: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역시 ‘대명사로 압축된 이름들을 고유명사로 환원해내는 놀랍고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땅의 수많은 ‘순이’, 그중에서도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의 삶을 다룬다. ‘한강의 기적에서조차 주변부로 몰린 여성 노동자의 삶을 본격적으로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미시적인 여성운동 흐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포착한’ 이민경 작가의 〈탈코르셋:도래한 상상〉과 2000년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를 정리한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여행기를 덤으로 얹은 수준 높은 인문서’ 〈여행의 이유〉도 올해의 책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배명훈 작가는 지난여름 〈시사IN〉에 실은 글에서 ‘아직도 SF 불모지 타령을 하는 사람들’은 ‘업데이트가 안 된 탓’이라며 ‘요즘 SF는 일종의 붐’이라고 했다. 김초엽 작가뿐만 아니라 번역서 분야에서도 SF 작가 테드 창의 〈숨〉이 고른 지지를 받았다. 가장 많은 편집자가 번역서 분야 ‘2019 올해의 책’으로 추천했는데 이유도 가장 간단했다. ‘테드 창이니까’ 혹은 ‘테드 창의 신작이니까’.

〈숨〉은 2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작가, 테드 창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17년 만의 소설집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가 컸다. 평행우주, 외계지성, 인공지능 등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사회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질문한다. 한 편집자는 ‘동시대 가장 찬란한 SF 소설을 선보이는 작가’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편집자는 ‘장르 문학을 이제는 감히 비주류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라고 말했다.

통계학 분야의 석학 한스 로슬링은 〈팩트풀니스〉를 통해 느낌을 사실로 인식하는 인간의 비합리적 본능을 이야기한다. 착각과 달리 세상은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13개 질문과 데이터로 보여준다. 김희중 개마고원 편집자는 ‘세상은 아직 더 좋아져야 하지만, 충분히 좋아지고 있다는 신선한 충격이 좋았다. 과장되고 자극적인 뉴스가 많은 시대에, 사실에 집중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려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번역서 부문에서도 ‘소설 약진’

번역서 분야에서도 소설의 약진이 눈에 띈다. 〈숨〉을 비롯해 2018년 맨부커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 35개국에 번역 출간된 애나 번스의 〈밀크맨〉과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태고의 시간들〉까지 세 권이 목록에 올랐다. 〈밀크맨〉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폭력에 노출된 열여덟 살 여성의 일상과 내면을 들려준다. ‘첫 페이지만 읽어도 대작의 느낌이 온다’는 응답자도 있었고, ‘개성 있는 문체, 여성 서사의 다양함에 놀라는 중’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여성 서사와 미시사가 결합된 가장 동시대적인 미학을 경험할 수 있는 책’으로 평가받은 〈태고의 시간들〉은 노벨상 발표보다 앞선 지난 1월 출간되었다.

인문학 분야의 강세도 눈에 띈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 론 파워스가 조현병을 앓는 두 아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처음으로 조현병을 정면으로 다룬 대중 교양서’라는 점, ‘한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상실과 고통이 어째서 공적인 토론의 영역으로 넘어와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으로 꼽혔다.

〈숨〉은 테드 창(위)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다시, 책으로〉는 출판계 종사자들의 관심사와도 깊이 닿아 있다. ‘이토록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힌트를 준다. 한 편집자는 ‘읽기 능력의 퇴화가 어떻게 깊이 읽기와 생각하기 능력까지 퇴화시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지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과학 분야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책은 〈빌트, 우리가 지어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이다. 공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마 아그라왈이 쓴 건축 교양서로, ‘최근 관심이 높아진 건축 관련 기초과학의 탄탄한 이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역사학·지리학·언어학·인류학·심리학 등을 총망라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신작 〈대변동:위기, 선택, 변화〉는 저자의 건재함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또 다른 감시 사회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담긴 〈생각을 빼앗긴 세계〉와 ‘미술사학자나 미술평론가들과 다른 각도에서 치밀하고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도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번역서 10권에 포함됐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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