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와 수출규제를 둘러싼 한·일 간 마찰은 일본이 미국 압력에 무릎을 꿇으면서 협상 실마리가 열렸다. 지소미아를 미국이 알아서 처리할 거라며 느긋해하던 아베 정권은 미국의 압력이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 쪽으로 급선회하자 당황했다. 협상이 풀리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의 고위급 간부 출신인 저자가 쓴 〈미국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했나〉를 보면 일본은 왜 미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래 미 군정청(GHQ)으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일본 지배 역사가 상세히 정리돼 있다.

일본의 전후 현대사는 요시다 시게루 초대 총리로 상징되는 친미파와 초대 내각의 이시바시 단잔 대장상으로 상징되는 자주파 간 대립의 역사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주 외교를 주장한 정치인들이 처절히 몰락한 역사이기도 하다. 미국은 특히 주일 미군기지 축소나 중국과 관계 강화를 주장하는 정치인에게 가혹했다. 이시바시 단잔과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이 미군의 경비 삭감 또는 철수를 주장하다 밀려나거나 의문사당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 이치로 등 정치인도 미국의 역린을 건드렸다가 몰락했다.

미국 정보기관 등이 수집한 부패 관련 정보를 언론에 던져주면 언론이 스캔들로 확대하고 도쿄 지검 특수부가 수사해 사건을 마무리하는 패턴이었다. 일본 검찰과 언론이야말로 미국의 일본 지배 도구이다. 검찰 독립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도쿄 지검 특수부는 원래 미 군정청 산하 ‘은닉물자 수사본부’가 전신이다. 주요 정치인 관련 수사는 주미 일본 대사관 출신 엘리트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계·재계·학계에 뿌리내린 친미 세력들 역시 일본 지배의 주요 축이다.

지소미아, 수출규제가 각축하는 과정에서 언뜻 드러난 미·일 관계의 내밀한 속내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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