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이별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책의 시작은 비교적 담담하다. 바쁜 직장인 은영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부재중 전화 메시지를 본 후에야 전화를 건다. 이모라면 비교적 가까운 사이일 텐데 번호조차 저장해놓지 않은 걸 보니 이들의 소원한 관계를 짐작해볼 만하다. 은영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이모의 목소리로 엄마의 운명 소식을 전해 듣는다.

만화의 컷은 느닷없이 장례식장. 은영은 슬픔보다는 원망의 혼잣말을 내뱉는다. “어떻게 마지막까지 이렇게 가버릴 수 있지?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남겨질 내 생각은 안 해? 끝까지 자기 생각뿐이지.” 은영은 참 ‘엄마답다’고 중얼거린다. 이 중차대한 사건에 그 어떤 슬픔의 묘사도 없이 만화가 시작되니, 제법 두툼한 이 책의 서사가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드라마나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살갑고 애틋한 모녀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증오하고 서로를 할퀴는 관계도 있고, 어떤 이유에서건 마음이 멀어져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관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자궁에서 아홉 달을 지내다 세상 밖으로 나온 같은 성(性)의 자식과는 설명 불가능한 인연의 끈이 끈질기게 이어져 있다. 그 끈은 때로 위태로울지라도 그렇게 세상 끝까지, 아니 죽음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은영의 엄마는 한 줌 재가 되어, 환원 불가능한 물질이 되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 유품을 모두 버리는 게 좋을 거라는 이모의 충고에도 은영은 엄마의 작은 일기장 하나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온다. 놀랍게도 그때부터 은영은 엄마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은영은 엄마의 일기장을 매일 조금씩 읽어가면서 자신이 몰랐던 엄마를 알아가고, 자신에게 느꼈던 엄마의 감정을 마주한다.

만화이기에 가능한 설정이지만, 아무튼 은영은 매일 자신의 집에서 엄마를 만나고 엄마와 대화를 나눈다. 화해의 시간이고 온전히 엄마와 가까워질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안녕, 엄마〉 김인정 지음, 거북이북스 펴냄

엄마의 일기장 보며 엄마와 화해

만화를 보는 내내 나의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도 엄마와 살가운 모녀 관계는 아니었다. 늘 팍팍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표현에 서투르고 사랑을 나눌 여유조차 없었던 나의 엄마는,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아주 조금 생겼을 무렵, 은영의 엄마처럼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었기에 그것은 내 삶에서 하나의 사건이었고, 나는 그 후로 오랜 시간 엄마를 그리워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엄마를 이해해갔다. 책의 주인공인 은영이 엄마의 일기장에서 엄마 남자친구를 알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나의 상황과 비슷해서 좀 놀랐다.

엄마 장례식장에서 한없이 울던 아저씨, 엄마의 남자친구를 기억한다. 뒤늦게 보게 된 편지들. 벌써 25년이나 된 일인지라 이제는 엄마의 기일조차 잊을 정도로 무심한 딸이 되었지만 한동안 오래도록 나는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다. 책 속의 은영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모를 재회를 통해 엄마와 화해했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엄마와 화해했고 엄마를 이해했다.

만화에서는 은영이 엄마의 일기장을 다 읽어나갈 때쯤 현실 속에서 마주하던 엄마의 이미지가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일기장을 다 읽었을 때 엄마는 그제야 은영의 곁을 온전히 떠난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그렇다. 온전히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어쩌면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삶이라 말하고 싶다. 생각보다 시간은 짧고 엉뚱한 것들에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붓는 사이, 정작 가까운 이들은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엄마와 소원해진 모든 딸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사는 엄마와 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모두가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더 많이 사랑하며 살게 되기를.

기자명 김문영 (이숲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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