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12월9일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밝게 웃고 있다.

12월10일 밤 11시50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얼굴은 밝았다. 천천히 걸어 나오던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늘어선 기자 중 한 사람에게 “자유한국당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탄핵소추안을 낸다던데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 원내대표는 “성공하지 못할 거죠 뭐”라고 짧게 답했다.

5분쯤 뒤 같은 자리에서 자유한국당은 비상 의원총회를 열었다. 심재철 신임 원내대표는 ‘밀실 야합 날치기 예산안 폭거 규탄문’을 읽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서서 “여당과 2중대, 3중대들의 야합으로 날치기 통과된 예산안은 위헌이며 원천 무효”라고 주장한 심 원내대표는, 연설 말미에 소리를 높여 “국민 여러분, 도와주십쇼오!”라고 외쳤다. 심 원내대표 뒤에는 자유한국당 의원 50명 이상이 ‘날치기 예산 불법’ ‘4+1은 세금도둑’ 등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앉아 있었다. 연설 직후 나온 박수소리는 느리고 작았다. 20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린 날,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희비는 극명하게 갈렸다.

하루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새 원내지도부 선출에 돌입한 12월9일, 자유한국당은 코너에 몰려 있었다. 우선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이 11월29일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 법안 전부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자, ‘민식이법’ 등 관심이 몰린 법안을 발목 잡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이날 오후로 잡힌 본회의였다. 이인영 원내대표는 2020년 예산안과 패스트트랙 법안(선거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안, 유치원 3법), 그 밖의 비쟁점 법안을 이날 일괄 상정하겠다고 공언했다. 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강행한다면 정기국회 후 임시회를 열어 표결 처리한다는 방침도 세워뒀다. 국회법상 필리버스터 대상 안건은 다음 회기에 자동으로 표결에 부쳐진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는 11월27일 ‘4+1 협의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준비모임)’를 가동했는데, 의석수를 합하면 재적 과반인 148석을 넘는 159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한국당은 심재철·김재원 후보를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으로 뽑았다. 심 원내대표는 후보 4명 중 가장 강경파였다. 투표 전 정견 발표에서 그는 “4명의 후보 중에 누가 투쟁력이 있는지” 물었다. 당선 소감으로는 “여당 원내대표, 국회의장에게 지금 추진하려는 것을 당장 멈추고 4+1 협의를 (자유한국당을 포함해) 다시 하라고 요구하겠다”라고 말했다. 정견에서 “투쟁의 방식도 혁신해야” 된다고 한 김선동 후보나 “뛰어난 실리적 협상가”를 자처한 강석호 후보와 달랐다.

심재철 신임 원내대표는 바삐 움직였다. 자유한국당은 기자들에게 ‘신임 원내대표·정책위 의장 기자회견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오전 11시45분, 심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자리를 옮기며 기자들에게 “당장 12시에 여야 3당 회동이 있어서 인터뷰 요청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을 양해해달라”고 말했다. 국회의장과 여야 3당(민주당·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국회의장실에서 약 1시간20분간 비공개로 회동했다. 의장실에서 나온 심재철 원내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회동 결과를 발표하자 몇 분 뒤 온라인에는 ‘필리버스터 철회, 예산안 내일(12월10일) 처리 합의’라고 속보 기사가 올라왔다.

하지만 5시간 뒤 심 원내대표는 당선 후 첫 메시지를 거둬들여야 했다. 긴급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온 그는 기자들에게 “예산안이 합의되면 다른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다. (…) 잘 안 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건 그때 가서 판단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2시간에 걸친 의원총회 뒤에 나온 ‘보류’ 입장이었다. 김재원 정책위 의장은 “합의문 내용 전체가 우리 당과 민주당이 예산안을 합의 처리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3당 원내대표 합의를 번복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반면 정춘숙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예산안 합의 처리는 나머지 약속 이행의 전제조건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연합뉴스12월11일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예산안 날치기 세금도둑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본게임’은 결국 패스트트랙 법안

12월9일 심재철 원내대표의 자유한국당 의총 발언에 따르면, 합의문은 이렇다. ‘① 예산안 심사는 오늘 당장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예결위 간사가 참여해 논의한다. 예산안은 12월10일 본회의에서 처리한다. ② 자유한국당은 지난 11월29일 상정된 본회의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신청을 의원총회 동의를 거쳐 철회한다. 위의 두 가지 합의가 선행된다면 국회의장은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어 본회의에 부의된 공직선거법과 공수처법 등 사법개혁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 안에 상정하지 않는다(후략).’

김재원 정책위 의장은 ‘논의한다’가 ‘합의 처리한다’는 의미이며, ‘합의문 전체의 전제조건’이 예산안 합의 처리라고 주장한 것이다. ‘협의한다’에 가까운 ‘논의한다’는 표현을, ‘합의해야 처리할 수 있다’로 확대 해석했다. 문언의 의미를 한참 벗어난 왜곡이다.

몇몇 언론은 자유한국당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2시간 동안 진행된 비공개 의총에서 합의 내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의총에서 3당 합의 내용이 부결됐다는 사실에 현장 기자들은 술렁였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6월 나경원 전 원내대표의 국회 정상화 합의문 역시 의총 끝에 부결시킨 바 있다.

12월11일 만난 한 민주당 관계자는 “사실상 이 시점부터는 자유한국당 협상단과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위임받은 권한이 충분치 않은 상대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합의를 맺는 데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미 4+1 협의체를 통해 협상력의 균형은 민주당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4+1 협의체는 예산안 강행 처리가 가능하도록 과반 의석을 확보해줄 뿐만 아니라, 민주당 협상단이 자유한국당에 전향적 태도를 보이지 못하도록 ‘옥죄는’ 역할도 했다.

여야 3당 예결위 간사들은 12월9일부터 12월10일 새벽까지 예산안 문제로 밤샘 논의를 했다. 12월10일 오전 비쟁점법안 처리 후에는 저녁 7시까지 약 5시간 동안 문희상 국회의장과 3당 원내대표, 3당 예결위 간사 7인이 모여 마라톤 회동을 가졌다. 논의는 끝내 타결을 이루지 못했고 문희상 의장은 저녁 8시 본회의 개최를 공지했다. 그 후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8시38분 열린 본회의에서 문 의장은 4+1 협의체의 정부 예산안 수정안을 곧장 상정했다. 조경태 의원은 반대 토론을 하겠다며 나섰으나 문 의장이 “발언해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외면했다. 문 의장이 토론 종료와 표결을 선포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사퇴하라!” 등 문 의장을 공격하는 구호를 외쳤다. 심재철 원내대표는 문 의장을 향해 계속 항의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저녁 9시6분 문 의장은 가결을 선포했다. 자유한국당은 예산이라는 실리도, 투쟁이라는 명분도 잃었다.

‘본게임’은 패스트트랙 법안이다. 선거법, 공수처법 등을 논의할 임시회에서는 더 첨예하게 맞붙을 가능성이 높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12월12일 정책조정회의에서 “검찰개혁과 선거개혁 법안 처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12월11일 “좌파 독재를 반드시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라며 국회 본청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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