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표재순 연출가(82)의 명함에 ‘한국문화기획학교 이사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문화기획학교는 문화기획자를 양성하는 비영리 법인이다. 더불어 8년째 다달이 연극, 음악회, 어린이극 등 무료 공연을 만들며 각종 사회공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1960년대부터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 뮤지컬을 비롯해 88서울올림픽 개·폐막식과 2002월드컵 전야제 등 국가 행사를 연출했다. 여전히 이력에 새로운 한 줄을 더하는 중이다. 최근 그가 또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원로 연극인들이 참여하는 ‘늘푸른연극제-그 꽃, 피다’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하프라이프〉의 연출을 맡았다.

소멸 직전 환하게 타오르는 방사선 원소의 속성을 의미하는 ‘하프라이프’처럼 황혼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전쟁터로 나가기 전, 운명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며 사랑을 나눈 클라라와 패트릭은 시간이 흐르고 노인이 되어 우연히 요양원에서 조우한다. 또다시 사랑에 빠진 이들의 사이를 반대하는 건 자식들이다.

그는 사랑이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80세 어른들도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으로 캐나다 원작의 희곡을 읽었다. 역사물 등 지금껏 주로 연출했던 작품과 결이 좀 다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존 마이튼은 이지적인 작가인데 연출하기가 쉽지 않다.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다. 유화처럼 짙은 삶의 이야기를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게 그리려 했다.”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가 연기한다. 주연배우와 작중 인물의 나이대가 비슷해 연기를 하는 동안 본인의 삶이 자연스레 투영된다. 신과 가족, 죽음과 나이 듦, 망각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망각이 기계와 다른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특권이기도 하다는 걸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주인공 클라라를 통해 이야기한다. 표재순 연출가는 고령화 사회에서 어린이를 대하듯 어른을 봐달라고 말한다. ‘어른 어린이’라고 표현했다.

대학 때 연극을 만나고 1963년 극단 산하를 창단한 뒤 주로 뮤지컬을 만들었다. 연극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워 방송국에 들어가 30여 년간 드라마 연출과 기획, 경영 일을 두루 거쳤다. 장르는 다르지만 기획과 연출이라는 외길 인생을 걸었다. 도대체 전공이 뭐냐고 야단치는 선배도 있었지만 어느새 융복합 시대가 왔고, 그가 걸어온 길이 그것이었다. 평생 호기심이 식지 않았다. 차 한잔 하며 기자 같은 젊은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대화하는 게 곧 쉬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나이지만 벌여놓은 일이 많다. 〈하프라이프〉를 비롯한 6개 연극이 상연되는 ‘늘푸른연극제’는 12월22일까지 이어진다. 12월25~26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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