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조선소에서 돈 모아서 유럽 여행도 갔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피렌체예요. 두오모 성당이 되게 유명하거든요. 노을 질 때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 주황색이에요. 성당 위에 올라가서 노을 질 때까지 기다렸어요. 하늘도 주황색, 지붕들도 주황색, 정말 아름다웠어요. 원래 이틀만 있으려고 했는데 일주일을 있었어요. 매일 저녁 올라가서 노을을 봤어요. 지금도 눈 감으면 그 장면이 기억이 나요. 그리워요(〈나, 조선소 노동자〉).”

최근 글을 읽고 쓴다는 사람에게 가장 충격적이며 감동적인 글은 11월21일 〈경향신문〉 1면이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기사는 산업재해(산재) 노동자 1200명의 이름을 보여준다. 바닥에 떨어진 안전모 그림과 함께 지난해부터 올 9월까지 주요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이름이 한 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한국 저널리즘의 존재 가치와 저력을 〈경향신문〉은 이 기사로 보여주었다.

근대국가에서 사람들의 목숨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처럼 ‘인구’로 존재한다. 근대 권력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고 할 때 그 ‘생명’은 1차적으로 국가 입장에서는 숫자로서의 인구이다. 인구를 통치의 대상으로 할 때 통계가 중요하다. 근대국가는 통계로 통치한다. 얼마나 태어나고 얼마나 죽고 왜 죽는지 죽음의 유형을 통계학적으로 분류한다.

산재 통계는 노동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생명으로서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통치 대상인 인구라는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노동 현장에서 한 해에 얼마나 다치고 죽는지, 어디서 어떻게 사고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산재 통계로 ‘정상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사고인지 아니면 이상 현상인지를 판단한다. 만일 죽음의 숫자가 통계적으로 ‘허용 범위’라면 정부 당국은 ‘정상적인’ 사건으로 판단한다.

근대 권력은 죽음을 ‘정상 범주’ 내에서 관리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권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덤에 꽃을 바치지 않는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살아남은 주변 사람들 몫이다.

물론 국가가 죽음을 기억할 때도 있다. 현충원 등에 묻힌 전사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대표적이다. 이를 시민종교라고 한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는 〈시민종교의 탄생〉(2019) 등 3부작을 통해 한국의 시민종교를 자세히 분석했다.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전사자들에게 묘지와 의례, 그리고 추모시설을 둔다. 그를 통해 국가 통합을 추구하는 게 시민종교이다. 근대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요소가 제거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전사자들만 기억하는 ‘시민종교’가 아니다. 한동안 노동자들의 죽음도 국가에 의해 선택적으로 기억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희생하며 이뤄졌다. 노동자들의 목숨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곳곳의 기간 시설이 만들어졌다. 국가가 노동자들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신성화했다. 노동자들은 조국 근대화를 위한 ‘산업역군’이 되었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물이 곳곳에 들어섰다.

민주화는 노동자의 죽음을 국가화하여 시민종교로 통치할 수 없다는 의미다. 민주화 이후 국가가 할 일은 분명하다. 국가는 일차적으로 이 죽음을 막고, 불가피하게 일어난 재해라면 그들의 재활과 복귀를 최우선에 둬야 한다. 하지만 재해 대책은 제대로 수립되지 못했고, 산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노동자들의 죽음은 더 이상 국가에 의해 시민종교적으로 숭고화되지 못한다. 이제 노동자들의 죽음은 통치 대상으로서 ‘숫자’로만 환원된다. 그 이름들은 기록되거나 기억되지 않는다.

산재는 철저히 버려진 죽음이자 고통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직면한 아이러니 중 하나다. 막지도 못하는 죽음이고, 국가에 의해 회수되지도 못하는 죽음이며, 이를 기록하는 강한 ‘사회’가 존재하지 않아 기억되지도 않는 죽음이다. 그 결과 산재 죽음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죽은 이의 주변 사람들의 고통으로만 기억된다. 자본이 조장하고, 국가는 방치하며, 사회는 외면한, 철저히 버려진 죽음이자 고통이 산재다.

2017년 5월1일, 경남 거제의 삼성중공업에서 벌어진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집 〈나, 조선소 노동자〉를 읽어보면 산재 생존자들의 삶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대자본에서부터 하청에 이르기까지 자본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발뺌하느라 바쁘다. 국가 역시 무책임으로 일관하며, 국가와 자본에 얽혀 있는 병원과 지역사회 등도 마찬가지다. 그 어디에서도 생존자들은 자신을 성의 있게 대하는 곳을 만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책임지고 도와주리라 기대하는 모든 곳에서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단 하나만 요구받는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이들을 사라지게 하는 게 가장 간편한 해결책이다. 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멀쩡하지 않은’ 사회를 ‘멀쩡하게’ 보이게 할 유일한 방법은 이들을 사회로부터 치우는 것이다.

살아 있기는 하되, 사회로부터 사라진 삶, 사회로부터 사라진 채 목숨만 부지하고 사는 삶, 이것을 ‘생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국가는 생존자들을 겨우 생존만 하게 하는 방식으로 관리하고 통치한다. 그들의 삶을 돌보는 게 아니다. ‘생존 이후의 삶’을 살아가게 하지 않고 그저 생존하게만 해서 삶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나, 조선소 노동자〉에 따르면 산재 생존자들은 대부분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다. 이들은 사건 당일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며 괴로워하고, 자기로 인해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며 자학하고, 더 이상 노동을 하지 못해 가족들이 고통받는다고 괴로워한다. 생존자들은 만남을 회피하고 스스로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이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의미에서 생존자들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생존을 신성시하는 인권과 인도주의라는 ‘숭고한’ 근대의 생명 권력을 비웃는다. 그는 인간의 권리를 생존의 권리로 국한시키는 것을 비판했다. 인간의 권리는 ‘생존’이 아니라 죽는 것까지 불사하는 ‘불멸의 존재’로서 가지는 권리다. 이것이 삶이다. 삶이란 생존을 무한대로 연장하는 영생이 아니라 죽음도 불사하는 불멸의 꿈을 말한다. 이 불멸의 꿈에 참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만남이라는 사건을 갖고 그 만남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어내는 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생존자들은 바로 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며 그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앞에서 인용한 산재 생존자의 글에 피해 생존자들이 바라는 삶이 드러난다.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명료하게 그걸 보여주는 글을 본 적이 없다.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어야 할 삶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산재의 고통에 대한 토로 끝에 나오는 저 노동자의 말은 산재 노동자들의 비참함과 고통을 넘어 오히려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연대’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비참함만 집중하는 이 시대에, 불멸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다시 살고 싶어 하는 저 말이야말로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며 우리를 저 노동자와 평등하게 연결하지 않는가. 비참한 존재로 평등한 우리가 아름다움을 꿈꾸는 불멸의 삶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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