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인간의 내구성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모욕은 간장종지만 하다는 것을, 금이 간 건물처럼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사람의 마음은 별일 아닌데도 무너진다는 것, 한 발짝 앞이 저승임을 이번 주에도 또 알아야만 했다. 정말 더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연예인들이 악플로 상처받는 게 좀 아니라고 본다. 악플 때문에 징징댈 거면 연예인 안 했으면 좋겠다.”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 사건을 조롱한 악플러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서 변명투로 한 말이다. 이 말이 이번 주 내내 모래처럼 입안에서 거슬렸다.

약육강식 세상이라지만 그래서 인간을 대할 때는 어떤 ‘주저함’이 필요하다. 주저함은 존엄의 마지노선을 지키는 태도다. 주저함이 있는 사회는 인간 존엄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모두 함께 고민하는 사회다. 한국 사회는 모두가 면접관이고 모두가 취업자인 면접장 같다. 서로를 떨어뜨리는 게 목적인 양 이유도 없이 상대를 평가하고 깎아내린다.

‘성소수자 차별법’ 발의한 의원들

주저함이 없는 사회에서는 작은 티끌도 가차 없다. 각자의 차이마저 천벌 받을 죄가 된다. 여자 연예인이라서, 일본인이라서, 성소수자라서, 난민이라서, 브랜드 아파트에 살지 못해서, 새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늙은 노동자인 주제에 농성을 해서, 법무부 장관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우리는 모욕받아 마땅한 사람이 된다. 가짜 뉴스를 돌리며 서로 연민하고 이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쌓아나간다. 정치 진영, 세대, 성별을 막론하고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번져나가는 모습은 흡사 좀비 영화 같다.

서로를 벼랑 끝까지 몰지 않으려는 주저함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주저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만든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서로의 존엄과 생명을 끊어야 할 상황을 만든다. 이를 피해 갈등을 해결하며 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국가에 주권을 위임한다. 국가는 주저함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두의 존엄과 생명의 보루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또 사람들이 서로에게 잔혹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 책임 또한 있다.

최근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과 국회의원 40여 명은 성소수자를 혐오하자는 내용이 담긴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차별 금지 사유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고,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여당인 민주당 이개호·서삼석 의원은 발의에 참여했다가 뒤늦게 철회하는 촌극을 벌였다.

어떻게 이리도 주저함이 없을까. 성소수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치자. 그래도 한 명의 인간, 국민의 존엄을 모욕하고 부정하는 데 이렇게까지 고민이 없어도 되는 것일까. 망하려고, 타락하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동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누구든 자신의 인생을 절박하게 산다. 그들을 차별해도 된다는 법을 내기 전에 한번은 직접 만나 삶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정치와 사회정책은 때로 잔인하다. 소수의 문제라서 다수결 논리에 밀릴 수도 있다. 안다. 소수자들은 그 잔인함을 이미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다. 정치인은 그 잔인함이 가하는 고통을 누구보다 자신의 것으로 공감해야 한다. 성소수자를 차별하자고 법안을 낼 때, 혹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이 차별과 혐오를 무시했을 때 국회의원들은 아파했을까, 아니면 총선에서 승리하고 기뻐할 본인을 상상했을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저들은 성소수자가 아닌 어떤 국민이라도 재선 따위에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선 저들은 해악이다.

기자명 황두영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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