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사할 집을 찾다 지친 윤상숙 작가가 혼자 카페에 앉아 셈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사를 몇 번이나 다녔지? 하나, 둘, 셋…. 열 손가락을 차례차례 두 번씩 접었다 폈는데도 셈이 끝나지 않았다. 서른네 해를 사는 동안 스물네 번이나 옮겨 다닌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스물네 번이나 정착하려고 했지만 결국 스물네 번이나 떠나고 말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생각은 곧 글로 돋아났고 조금씩 시나리오로 자라났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박제범 감독도 셈을 해보았다. 자신 또한 열 번 넘게 이사 다닌 걸 깨달았다.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하느라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시절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가끔 들른 부모 집에는, 이제 같이 살지도 않는 자신의 방이 늘 마련되어 있었다. 자신의 집에는 부모님 공간을 따로 두지 않는데. ‘윗세대와 우리 세대는 가족과 집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다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집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진 이유다.

주인공 은서(이유영)는 서른 살. 서울에서 혼자 산다. 또 이사할 집을 찾고 있다. 틈틈이 집을 보러 다니지만 번번이 헛걸음만 한다. 집을 빼줘야 하는 시한은 이번에도 어김없다. 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사는 인천 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컴 백 홈. 같이 살지 않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자신의 방에 짐을 푼다.

아버지 진철(강신일)에게 오랜만에 식구가 생겼다. 두 딸도 떠나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집에 가구처럼 덩그러니 주저앉은 인생이었는데, 모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온기가 집에 퍼진다. 어떤 문도 척척 여는 솜씨 좋은 열쇠공이지만, 가족들 마음의 문만은 끝내 열지 못한 채 맞이한 황혼. 낡은 집과 함께 혼자 늙어가는 아버지. 그래서 딸은, 쉽게 떠나지 못한다. ‘내 집’을 구하는 대신 ‘우리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나는 살고 싶은 집에서 사는가

영화 〈집 이야기〉는 세트를 짓지 않고 실제 장소를 찾아다니며 찍었다. 반지하 셋방, 철거를 앞둔 단독주택, 원룸에서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까지, 직접 배우가 들어가 각 집에 사는 인물을 연기했다.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밥처럼 잘 지은 대사를 주고받다가, 타버린 삼겹살과 함께 들이켜는 소주처럼 쓰디쓴 장면을 종종 집 안에 들여놓는다. 사라져가는 것들이 남긴,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들려준다.

배우 이유영의 깊은 얼굴이 창문이 되고 배우 강신일의 슬픈 어깨가 지붕이 되는 영화, 열쇠와 달력과 노을과 비행기로 지어올린 이 작지만 튼튼한 영화를 보고 나면, 가만히 자신의 이사 횟수를 셈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묻게 된다. 나는, 살고 싶은 집에 지금 살고 있나? 알고 싶은 이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나? 놓치고 싶지 않은 손을 이미 놓아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떠나야 할 때 머물고, 머물러야 할 때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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