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막전막후, 원칙 깬 일본 실익 챙긴 한국
  • 남문희 기자
  • 호수 638
  • 승인 2019.12.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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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 통보 효력 정지’ 협상에서 일본은 그동안 유지해온 원칙을 포기했다. 한국은 미국의 ‘지소미아 유지’ 압력을 이겨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을 압박해 합의 도출을 유도했다. 한국은 여전히 지소미아 종결 카드를 쥐고 있다.
ⓒ연합뉴스11월23일 G20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왼쪽)이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일본은 ‘보통국가’가 아니다. 정상국가도 아니다. 일본 스스로도 인정한다. 오죽하면 아베 신조 총리 필생의 소원이 일본이 보통국가로 전환되는 것이겠는가.

보통의 국가에서는 자국 외교관이 국가의 대표로 다른 나라 외교관과 협상하면, 그 결과를 준수한다. 상당 기간 밀고 당기며 어렵게 합의에 도달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 정상국가다. 최근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이하 지소미아)’ 및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둘러싼 협의 과정에서 일본은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11월22일 오후 6시, 한국 정부는 지난 8월23일 일본 측에 전했던 ‘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효력을 정지한다고 발표했다. 지소미아를 종료한다는 통보를 유예하고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얘기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분쟁의 원인이며, 일본의 태도 변화 없이는 지소미아를 종료할 수밖에 없다’는 기존 입장을 감안하면, 태도 변화였다.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하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어떤 양보를 얻었는지도 분명치 않아 문재인 정부 지지층조차 충격을 받았다.

한국, 지소미아-수출규제 연계해 승리

이날 한국 정부의 발표 내용과 형식은 한·일 외교 당국 간의 합의를 준수한 것이었다. 11월22일 오후 6시 정각에 한국 측 조치 내용을 발표한 김유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의 발표문 첫머리에 그 얘기가 나온다. “한·일 양국 정부는 최근 양국 간 현안 해결을 위해 각각 자국이 취할 조치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즉, 김 사무처장 발표 내용은 양국 간 현안(지소미아와 수출규제) 해결을 위한 합의 사항 중 한국 측이 취할 조처만 추려낸 것이었다. 일본 측의 조처에 대해서는 같은 시간 일본의 외교 당국이 발표하는 것으로 사전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 측의 발표 내용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8월23일 한국이 일본에 전달한 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효력을 정지한다. 둘째, 한국 정부는 (일본이 수출규제 관련 협의에 충실히 임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지소미아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다. 일본 정부도 여기에 이해를 표했다. 셋째, 한·일 간 수출관리 정책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일본 측의 3개 품목 수출규제에 대한 (한국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를 정지한다.

ⓒ연합뉴스11월22일 김유근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이 ‘지소미아 종료 통보’ 효력을 정지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 발표문만 보면 한국의 일방적인 양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일본의 조처가 ‘정상적’으로 발표되었다면 합의의 전체적 윤곽이 드러났을 것이다. 발표 시간도 합의되어 있어서 한국 당국자들은 기자들에게 일본 측이 발표할 사전 합의 문안을 알리며 그 맥락까지 해설해주었다.

일본 측이 이날 오후 6시에 발표할 문안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수출관리 정책 대화에 대해서는 현안 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과장급 준비회의를 거친 후 국장급 대화를 실시하여 양국이 수출관리에 대해 상호 확인하기로 하였다. 둘째, (수출규제된 반도체 관련) 3개 품목에 대해서는 개별 품목별 한·일 간 건전한 수출 실적의 축적 및 한국 측의 적정한 수출관리 운용을 위해 재검토가 가능해진다.”

용어가 딱딱하고 문장도 복잡하지만 어쨌든 일본이 발표하기로 외교 당국자 간 합의한 문안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수출관리 정책 대화’란 한국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관리 우대조치) 국가에 다시 복원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협의 과정에서 한국 측은 ‘화이트리스트 국가 복원’이라는 직접적 표현을 사용하라고 주장했다. 일본 측은 자국이 처음부터 수출관리의 틀에서 문제를 제기한 만큼, 내용은 양해하되 표현엔 ‘수출관리’를 넣자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합의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현안 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이다. 과장급 회의의 준비를 거쳐 국장급 대화에서 수출관리 정책의 문제, 즉 한국을 다시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복원하는 문제를 협의할 텐데, 이 같은 대화가 현안 해결에 기여하는 방향이 되도록 운영하겠다는 의미다.

둘째 문장은,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처의 본보기로 시행한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내용이다. “개별 품목별 한·일 간 건전한 수출실적의 축적 및 한국 측의 적정한 수출관리 운용을 위해 재검토가 가능해진다.” 문장이 모호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명확하다는 것이 한국 고위 당국자의 설명이다. 일본이 거론한 ‘수출관리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일본 수출기업들이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소재와 부품을 수출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주장해온 대로 한국 측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문제의 소재를 잘 관리하지 못하는 경우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둘째 문장을 읽어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지난 7월 일본이 3개 품목의 대한(對韓) 수출을 개별 허가로 전환한 이후 시기 동안 해당 품목에 대한 한·일 양측의 수출관리 운용을 검토한다.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부터 포괄허가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첫째와 둘째 문장 내용을 합치면 일본 측 발표문의 의미는 이렇다. 우선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해 먼저 포괄허가로 전환한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국가 복원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국장급 대화를 해나간다.

11월22일 오후 6시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및 WTO 제소 관련 발표는 이런 일본 측 발표문을 전제한 것이다. 즉,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유예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풀고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복원하는 조처를 조건으로 한 것이다. 일본 측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한국은 언제든 지소미아를 종료할 수 있고,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양해했다.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일정 기간 내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지소미아를 자동 종료시키는 좀 더 강력한 문구도 검토했으나, 이 경우엔 조약을 개정해야 하고 또다시 양측의 합의가 필요해서 실현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대신 한국이 지소미아를 언제든 종료할 수 있다는 점에 관해 일본 측의 이해 내지 동의를 받아놓았다는 것이다.

ⓒ연합뉴스이다 요이치 일본 경제산업성 무역관리부장.

WTO 제소 중단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풀기 위한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중단하겠다는 내용이다. 진전이 없거나 대화가 중단되면 언제든 제소 절차를 복원하면 된다.

이번 합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이야말로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내세워왔던 원칙을 무너뜨렸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강제징용 문제 해결 없이 수출규제 철회는 없다’고 강변해왔다. 또한 지소미아는 일본의 수출규제와 별개라고 주장했다. 이번 합의 내용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강제징용 문제와 수출규제를 연계시킨 일본 정부의 원칙이 깨진 셈이다. 이에 비해 지소미아 연장은 화이트리스트 국가 복원 및 반도체 3개 소재 수출제한 해제를 위한 한·일 국장급 대화와 사실상 연계되었다.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는 별개’라던 일본의 원칙도 깨진 셈이다. 11월22일 저녁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한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강제징용-수출규제 연계 전략을 한국이 지소미아-수출규제 연계 전략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 측 당국자들은 큰 오류를 범했다. 일본 정부가 ‘정상’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발표 시간, 문안, 문안 해석 등이 사전 합의대로 이행되었다면 문제가 없었다. 11월22일 저녁, 한국 당국자들은 기자들에게 합의 사항을 설명하는 와중에도 “지금쯤 일본도 같은 내용을 발표하고 있을 거다”라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합의문에 대한 해석이 우리 측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일본 측과 공유한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예상을 벗어나고 말았다. 당국 간 합의 사항을 어겼다. 발표 시간부터 제멋대로였다. 양측이 오후 6시에 발표하기로 했는데도, 일본 정부 측은 언론에 미리 정보를 흘려 약속보다 한 시간 먼저 일반적 내용을 보도하게 했다. 한국이 지소미아 연장 및 WTO 제소 절차를 철회할 의사를 표시해서 일본 정부가 협의에 응해줬다는 식이었다. 한국은 약속대로 6시 정각에 합의 사항을 발표했지만 일본 정부 측은 그로부터 6~7분 뒤에야 발표장에 나왔다. 한국 측이 먼저 요청하고 일본은 마지못해 응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한 연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의용 실장이 일본에 ‘격하게’ 경고한 이유

발표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가관이다. 일본의 발표는 외무성과 경제산업성 순서로 이뤄졌다. 〈시사IN〉이 입수한 이날 일본 정부의 발표문과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보면 일본 측의 기존 방침에 한·일 간 합의 문안을 교묘하게 끼워넣는 식으로 발표했다. 일본 당국의 발표를 기자들이 믿지 못하고 비슷한 질문을 거듭 반복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외무성 발표는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장관이 맡았다. 그는 한국 정부가 먼저 ‘지소미아 종료 통보를 정지한다’는 취지로 일본 측에 통고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 정부의 결정에 대해 “북조선 문제 등에 대응하기 위해 안전보장상의 일·한, 일·미·한 간 긴밀한 제휴가 중요한데, 현하의 지역 안전보장 환경을 앞두고 한국 정부로서도 전략적 관점에서 판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자의적 해석을 덧붙였다. “지소미아 문제와 수출관리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수출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WTO 제소 절차’를 중단한다는 한국 측의 통보를 수용해서 관계 당국 간 대화를  승낙했다.”

경제산업성에서는 이다 요이치 무역관리부장이 나섰다. 그는, 한국이 11월19일 외교 루트를 통해 ‘WTO 제소 절차를 중단한다’고 통고한 다음부터 한·일 간 대화가 개시되었다고 못 박았다. “한국이 수출관리의 문제점에 대해 개선할 의욕이 있다는 것으로 판단해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 이렇게 ‘한국 측이 대화를 먼저 제안했다’라고 전제해놓고 한·일 간 합의문을 끼워넣었다. “수출관리 정책 대화에 대해서는 해결에 이바지하기 위해 과장급의 준비 회합을 경유하여 국장급 대화를 행해 양국의 수출관리에 대해 상호 확인하는 것으로 한다.”

3개 품목 수출규제 문제에 대해 일본은 “그동안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수출관리에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라는 종전의 일방적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금후에도 개별 심사로 (수출) 허가를 행한다는 방침엔 변경 사항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 다음에 합의 사항인 ‘건전한 수출실적 누적 및 한국 측의 적정 운용에 따라 수정이 가능하다’라는 문구를 배치했다.

교묘하지만 속이 들여다보이는 화법이다. 기존 입장을 강조한 뒤 합의문의 문구를 읽었다. 이로써 합의문의 지위를 격하시키거나 왜곡해, ‘한국이 먼저 양보해서 대화가 이뤄졌고, 일본 정부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일본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한국은 지소미아 종료 연기를, 일본은 수출규제 해제를 위한 국장급 대화를 발표했다. 그런데 일본 측 발표자는 두 사안이 무관하다고 강변한 것이다. 일본 기자들은 ‘정말 무관한지’ 확인하려는 비슷한 질문을 3~4차례 반복했다. 실제로 일본 기자들 중에서도 두 사안이 별개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일본 측의 합의 사항 위반을 강력 경고했다. 그는 11월24일 ‘일본 측이 합의한 발표 시간을 준수하지 않은 점’ ‘한국이 WTO 제소 중단을 먼저 통보하고 수출관리까지 개선하겠다고 해서 대화가 시작됐다는 경제산업성 발표 내용’ ‘앞으로도 개별 심사 허가를 계속하겠다는 발언’ 등을 합의 사항 위반으로 지적했다. 이런 내용이었다면 처음부터 합의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정 실장의 경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격했다. 경제산업성 발표에 대한 한국 정부의 항의에 일본 측이 외교 라인으로 사과해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Try me(‘나를 시험해봐’)”라는 영어 문구까지 인용했다. 일본이 자꾸 자극하면 한국 측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그는 또한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카드로 압력을 가해 한국이 굴복했다’ ‘아베 총리가 일본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등 일본발 뉴스에 대해 “일본의 정부 지도자로서 과연 양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말인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일본 총리를 겨냥해 ‘양심이 있는 거냐’고 직격탄을 날렸는데도 일본 정부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정 실장이 거론한 일본 외교 라인의 사과에 대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로서 사과한 적은 없다”라고 비껴간 뒤 더 이상의 확전을 꺼리는 모양새다.

국내 언론은 일본 언론 보도에 기대어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실익도 없이 양보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실제로 이번 협상에서 밀린 것은 일본 정부다. 일본 정부는 협상의 큰 틀에서부터 자신들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 없이 수출규제 해결 없다’고 반복해왔지만, 강제징용은 별도의 협상 테이블로 넘어갔다.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는 무관하다’고 강변해왔으나 합의문에서 사실상 연계됐다. 더욱이 일본은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여전히 쥐고 흔드는 상황에서 앞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연합뉴스11월15일 문재인 대통령이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

‘믿던 미국’에 발등 찍힌 아베

일본 처지에서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미국의 태세 전환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지소미아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지소미아는 미국의 안보 이익과 직결된 것이기에 일본이 가만있어도 미국이 한국의 팔을 꺾어주리라 내다봤다. ‘지소미아를 연장하려면 수출규제를 풀라’는 한국 측의 거듭된 요구에 미동도 하지 않은 이유다.

지소미아 카드까지 등장하자 일본의 예상대로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소미아는 양날의 칼이었다. 강제징용과 수출규제는 한·일 간 내정에 관련된 문제다. 미국이 직접 나서기 어려웠다. 지소미아는 다르다. 미국의 국익과 직결되므로 직접 나설 수 있다. 일본이 미국에 ‘먼저 한국을 압박해 지소미아 문제를 해결하라’고 종용했으나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가 먼저’라며 완강히 버텼다. 결국 미국의 압박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 전개였다. 일본 편이라고 굳게 믿었던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관리들이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일 간 기 싸움이 미국의 개입 이후 한국 편으로 기운 게 확연해진 때는 11월15일이다. 이날 미국 고위 당국자가 “해군의 비유로 얘기하자면 오랫동안 뱃머리가 내려가고 있었지만 올라오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일본이 미국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는 징후가 나타났다. 다음 날인 11월16일 일본 측이 외교 라인으로 이번 한·일 간 합의의 기본 골격에 해당하는 사안을 전달해왔다. ‘화이트리스트 국가 복원 등 수출규제 철회를 논의하기 위한 국장급 회의를 제안’한 것이다. 또한 ‘수출규제를 되돌리려면 형식적이지만 한국의 수출입 관리체제에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구체적인 시기까지 거론했다. 일본이 수출규제 철회에 걸리는 시간까지 언급하며 대화를 먼저 제안했다는 게 이번 한·일 간 협상과 합의의 출발점이자 기본 골격인 셈이다.

일본의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엔 당연히 미국이 있다. 그동안 ‘징용 문제 해결 없이 수출규제 변화 없’고 ‘수출규제 문제는 지소미아와 무관하다’고 반복해온 일본 정부로서는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가 몰고 올 국내 정치적 후폭풍이 두려웠을 것이다. 외교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언론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지소미아 종결 카드를 여전히 쥐고 있으며 미국 역시 수출규제 문제에 대해 일본의 팔을 꺾고 있는 형국이어서 아베 총리가 더 이상 버틸 여지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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