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가마의 초상화.

군중이 집으로 데려온 백인을 본 북아프리카 출신 상인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건넨 첫마디가 “빌어먹을, 당신네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였다. 1498년 5월, 인도 서해안의 무역항 캘리컷에서 벌어진 일이다.

백인은 포르투갈 함대의 일원인 죄수였다. ‘데그레다두(Degredado)’라고 불렸던 이들은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장거리 항해에서, 오늘날의 탐사용 로봇 같은 역할을 맡았다. 본국에서 사형 또는 추방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이들 중, 학식이 있고 건강한 이들을 골라 함대에서 복무하게 했다. 이들의 임무는 항해 중 만나는 이민족을 먼저 접촉하는 것이다. 죄수들은 항해 경로에 위치한 이민족들의 언어까지 배워야 했다. 호전적인 부족을 만나면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반대로 우호적인 부족을 만나면, 함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 남아 무역 거점을 만들어야 했다. 무역 거점을 만들면 죄를 용서받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향신료 수입 루트 개척은 포르투갈 ‘국책 사업’

1497년 7월 포르투갈 함대가 탐사선 3척에 데그레다두 18명을 포함한 선원 180명을 나눠 싣고 리스본을 출발했다. 함대를 이끄는 원정대장은 바스쿠 다가마, 이웃 나라들과의 해전에서 두각을 보인 제독이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향신료의 땅, 인도. 만일 도착하기만 한다면, 베네치아와 피렌체가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산 향신료의 독점을 깨고 엄청난 부를 챙길 수 있었다. 이들의 항해는 오랜 시간 막대한 돈과 인력을 들여 추진해온 포르투갈판 국책 사업이었다.

바스쿠 다가마 함대의 항해는 순조롭지 않았다. 남쪽으로 내려감에 따라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로 가려는 바스쿠 다가마의 의지는 확고했고, 함대는 풍랑을 헤치며 위태로운 항해를 이어갔다. 이들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기록한 테이블 모양의 산을 발견했을 때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들이 희망봉에 도달한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이 산은 지금도 같은 이름(테이블 마운틴)으로 불리며,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왔다는 감격을 맛보게 한다.

아프리카의 동해안에 접어들고 나서는 함대에 행운이 따랐다. 해안 곳곳에 정박해 무역항 건설을 병행하며 북상하다가, 지금의 케냐에 해당하는 말린디 항구에서 바다에 정통한 아랍계 수로 안내인을 만났다. 그의 조력에 힘입어, 다가마 함대는 적절한 계절풍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인도양을 횡단하는 데에는 2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포르투갈을 떠난 지 10개월이 되던 1498년 5월17일, 마침내 캘리컷 앞바다에 도착했다. 다른 기항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데그레다두 한 명을 보트에 태워 해안으로 보냈다. 그를 본 튀니지 상인의 놀라움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는 유럽으로 향하던 향신료의 독점 루트가 붕괴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직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얄팍했던 포르투갈인들은 본국보다 훨씬 부유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한 캘리컷의 군주를 아프리카의 일개 부족장처럼 취급했다. 루비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 금실로 짠 방석 위에 앉은 그에게 들고 간 선물이 고작 꿀, 두건, 대야, 거울 따위였으니. 다가마 일행은 다른 아랍계 상인들을 내쫓고 자신들과 독점적 통상관계 맺을 것을 요구했다. 군주는 관대하게도 이들을 일시적으로 억류한 뒤 풀어주었다. 게다가 원하는 향신료를 살 수 있도록 (비록 품질은 좀 의심스러웠지만) 허락했다.

1498년 11월20일, 바스쿠 다가마의 함대는 캘리컷을 떠났다. 얼굴 하얀 사람들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과, 이 지역의 앞날에 대한 뒤숭숭한 소문,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리고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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