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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십(十)’과 ‘일(一)’을 합하면 농업의 근간인 ‘흙’을 뜻하는 ‘토(土)’가 된다. 십일월 십일일(11월11일)이 법정기념일인 ‘농업인의 날’로 정해진 이유다. 농업이 국민경제의 근간임을 널리 알리고, 농민의 노고에 감사하는 날이건만, 주인공인 농민들은 축제 대신 상경 투쟁을 불사하며 거리로 나섰다. 최근 정부가 앞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데 이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타결됐다는 소식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WTO 협정 중 하나인 농업협정은 개도국에 농산물 관세의 감축 폭과 기간, 국내보조금 등에서 “차등적이고 보다 유리한 대우”를 약속하고 있다. 한국도 1995년 WTO 협정 발효 당시 개도국으로 분류되었고, 20년 넘게 개도국으로서 관세 및 보조금 감축 등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왔다.

개도국 특혜를 받았음에도, 같은 기간 급속도로 수입 농산물이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 2015년에는 쌀 시장도 개방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WTO 농업협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협정이 체결되면 아예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부가 갑자기 이런 선언을 한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중국·인도·한국 등 개도국의 탈을 쓴 선진국들이 농업 분야에서 WTO 개도국 특혜를 남용해 미국이 손해를 보고 있다’며 ‘이를 3개월 내 손보지 않을 경우 더 이상 개도국으로 대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개도국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법률적·실질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미국 내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했다.

답보 상태에 있는 남북 관계, 한·미 방위비 분담, 한국산 자동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결과를 낳을 미국 무역확장법 제232조의 적용 여부 등 미국과 협상할 일이 산적한 정부 처지에서는 당장 잃는 게 없는 패를 내주는 것이 묘수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우리 농업계에는 언제 어떤 내용으로 타결될지 모를 다음 협정에 관한 약속일 뿐이라는 ‘할 말’도 남겨두었다.

‘지금 당장 개도국 옷을 벗으라’던 트럼프가 ‘갈아입을 일이 생기면 그때는 개도국 옷을 입지 않겠다’는 정부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국내 농업계의 반발은 즉각적이고 분명했다. ‘미래’의 포기 선언을 ‘현재’의 농업 포기 또는 농민의 희생 강요로 해석했다. 뒤이어 나온 정부의 RCEP 타결 선언은 이러한 농업계의 해석에 힘을 실었다.

RCEP는 한국과 일본·중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및 베트남·타이·인도네시아 등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 10개국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참가국이 대부분 대규모 농업 수출국이기 때문에 협정 발효 시 국내 농업에 대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농업은 대통령이 직접 챙긴다더니

알고 보니, RCEP 협상 타결이 아니라 협정문 본문의 문구를 다 완성했다는 의미였고(교역 품목별 구체적인 시장 개방 정도에 관한 협상이 진행 중이다), 주요 참가국인 인도마저 빠져 있는 상태였지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섣부른 RCEP 타결 선언을 아직 진행 중인 협상에서 농업계를 따돌리려는 꼼수로까지 해석했다.

농민들이 정부의 진심을 오해하거나 통상협정을 잘 알지 못하는 탓일까? 설사 그런 측면이 있더라도, 이는 정부가 자초했다. WTO 개도국 특혜를 포기하고 RCEP 타결을 선언하는 이 모든 과정에 농민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농업정책 부재다. ‘농업은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올해 4월에야 뒤늦게 출범한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는 WTO 개도국 특혜 포기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WTO 개도국 특혜 포기 및 RCEP 타결의 대책으로 농가 경쟁력 강화를 주문한다. 이대로라면 우리 농업의 미래는 암담하다. 어디 농업이 농민만의 문제던가? 논밭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려 하는가.

기자명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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