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데생〉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지음, 박보나 옮김, 에디시옹 장물랭 펴냄

한 남자가 친구 에두아르를 땅에 묻으며 애도한다. 그 남자 에밀은 친구의 장례 이후 큰 슬픔과 마주한다. 우리 모두의 젊은 시절이 그렇듯, 한때 좋아하던 것들에 탐닉하고, 예술과 문학에 대해 토로하며 우정을 최대 가치로 여긴 그들. 세월과 함께 푸르른 날들은 사라져가고, 그렇게 하나둘 작은 새처럼 세상을 떠난다. 며칠 후, 에밀은 친구가 죽기 전에 부친 편지를 받는다. 운명은 그에게 마지막 친구의 선물을 가져다준다.

친구가 말한 주소로 찾아가는 에밀. 마음에 드는 걸 딱 한 가지만 고르라는 친구의 말에 그는 온갖 화려한 예술품으로 가득 찬 창고에서 단 한 점의 데생을 고른다. 작품 이름은 ‘리플렉션(reflection)’.

친구 에두아르는 죽기 전, 자신의 절친이 이 그림을 고르리라는 걸 예견했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에밀이 친구의 편지를 꺼내 보며 첫 글자의 알파벳을 잇자, 그 단어는 그림의 제목과 같은 리플렉션이다. 에밀은 이때부터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풀기 시작한다.

메타포로 가득한 삽화의 비밀

흑백의 명암으로만 그려진 삽화들로 가득한 책.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이 그래픽노블은 메타포로 가득하다. 주인공 에밀이 그림의 비밀을 풀어가듯, 독자도 책장을 넘겨보면 볼수록, 아는 만큼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총 3개의 장 제목은 ‘데생-운명-의도’. 작가는 이 제목의 발음에도 의도를 심어 놓았다. 원어는 dessin-destin-dessein(데생-데스탱-데생). 거의 흡사한 발음의 이 단어들은, 발음뿐 아니라 의미에서도 서로를 비추고(리플렉션), 같은 운명을 타고났음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림(예술)이 곧 운명이고, 그것이 무한히 반복되며 반영되는 게 하나의 온전한 세상이라는 점을.

이 원본 작품 ‘리플렉션’은 에두아르의 거실을 그린 그림인데 에밀은 돋보기로 확대해 보다가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풀게 된다. 그림 속 아주 작은 점이라도 확대해 보면 그 작은 부분이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에밀은 그 ‘작은 세상들’을 하나씩 확대해서 큰 화폭에 옮겨 담는다. 그림마다 리플렉션 1, 2, 3… 이라는 제목을 붙여 팔아 돈과 명성을 함께 얻게 된다. 그가 그린 그림이 친구가 남긴 하나의 세상(작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모른 채로 말이다.

유명한 화가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전시를 하고 부를 얻는다. 이제 더는 재생산할 힘이 없어 한계에 도달한 초로의 에밀에게 공허함만 남았다. 과연 이것이 전부였을까? 친구는 그에게 무엇을 남기려 했을까? 에밀은 집에 돌아와 다시 ‘리플렉션’ 원본을 찬찬히 살핀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다소 전율이 느껴지는데, 미처 풀지 못했던 친구의 메시지, “그림을 칠하라”는 말을 찾아낸다. 그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 ‘반사된’ 사물들을 이어가며 색을 칠한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완성되는 자기 자신의 모습. 이제야 비로소 에밀은 친구의 수수께끼를 풀게 된다. 모든 비밀을 풀고 난 후, 에밀 역시 작은 새가 되어 세상을 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많은 부와 명성을 안겨다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그림의 ‘완성본’은 창고 구석에서 썩는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작가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2001년 작품인데 국내에는 얼마 전에 처음 소개되었다. 유수의 국제 만화대회 및 평단에서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진 작가는, 이 작품 〈르 데생〉으로 지금은 사라진 스위스 시에르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

기자명 김문영 (이숲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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