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et 화면 갈무리〈프로듀스〉 시리즈 투표 조작 의혹 사건으로 이에 가담한 담당 PD와 CP가 구속되었다.

불안한 눈빛을 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뜨거운 조명 아래, 사람들은 긴장과 더위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런 이들의 상태는 아랑곳없이 늘어선 수십 대의 카메라는 사람들의 흔들리는 동공, 긴장감으로 흐르는 땀방울, 떨리는 손가락이나 입술을 클로즈업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모든 상황의 칼자루를 쥔 진행자는 영원 같은 10여 분간 프로그램 이름,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 이름, 이들이 획득하게 될 상금 액수와 상품 등 이미 충분히 노출된 정보를 무의미하게 반복한다. 시청자의 참을성이 극에 달할 즈음 그가 마침내 외친다. “60초 후에 계속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익숙할 이 장면은 2016년 시즌 8을 마지막으로 잠시 휴지기를 선언한 엠넷(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슈스케)를 대표하는 순간이다.

‘대국민 투표’를 앞세워 새로운 스타 탄생을 천명한 슈스케는 2009년 방영한 시즌 1을 시작으로 한국에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을 불게 한 주역이다. 켈리 클락슨, 캐리 언더우드 등의 슈퍼스타를 배출한 〈아메리칸 아이돌〉(미국), 폴 포츠, 수전 보일을 탄생시킨 〈브리튼즈 갓 탤런트〉(영국) 등 2000년대 초중반 영미권을 강타한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참고로 탄생한 프로그램은 ‘스타 탄생’ 또는 ‘인생 역전’의 짜릿함을 앞세워 시청자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휴대전화 판매원, 하역 장비 정비사, 무명 가수 등 변두리 삶을 살던 이들이 일면식 없는 시청자의 선택으로 단숨에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는 설정은 인종과 언어를 넘어 누구에게나 소구하는 매력적인 서사였다.

슈스케의 성공 이후 한국에는 말 그대로 오디션 프로그램 전성시대가 열렸다. 특히 〈슈퍼스타 K〉를 성공적으로 론칭한 엠넷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오디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세로 장르와 분야를 초월한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쇼미 더 머니〉 (힙합), 〈언프리티 랩스타〉(여성 힙합), 〈보이스 코리아〉(보컬리스트), 〈보이스 키즈〉(어린이), 〈프로듀스 101〉(아이돌), 〈아이돌 학교〉(여성 아이돌)까지, 모두 오디션 형식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놀라운 건 이들 대부분이 시청률이나 화제성 측면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엠넷의 승승장구에 다른 케이블 채널은 물론 공중파 채널도 동요했다.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과 〈언더 나인틴〉(MBC), 〈K 팝스타〉(SBS), 〈탑밴드〉와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더 유닛〉(KBS), 〈믹스나인〉과 〈슈퍼밴드〉(JTBC) 그리고 ‘국민 대세’ 송가인을 낳은 TV조선의 〈미스트롯〉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느새 방송가의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10년간 굳건하게 자리 잡은 오디션 붐을 이끈 건 다름 아닌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었다. 대부분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해당 프로그램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노래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이돌을 꿈꾸는 연습생이라면 누구나, 힙합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선에 참가할 수 있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누구나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기회의 균등을 뜻했다. 〈슈퍼스타 K〉 우승자인 허각(시즌 2)과 울랄라세션(시즌 3)은 그 자체로 이 드라마틱한 성공서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각각 환풍기 수리기사, 위암 투병 환자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잃지 않았던 이들은 수십만 분의 일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을 차지하며 가요계 및 연예계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을 지지해준 시청자들이 든든한 활동 지원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연합뉴스2010년 10월 〈슈퍼스타 K 2〉에서 우승을 차지한 허각은 환풍기 수리기사였다.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향하는 눈

여기에 하나의 믿음이 더 더해졌다. 바로 ‘국민투표’였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누구나 현장에 모인 관객들 혹은 프로그램 시청자들의 투표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딱히 요구하지도 않았건만, 이들은 시청자에게 ‘국민 프로듀서’ 같은 거창한 감투까지 씌우며 투표를 독려했다. 우리의 손으로 뽑는 미래의 스타, 당신의 손으로 바꿀 수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의 미래, 꿈, 희망. 이러한 시청자 참여 투표 방식을 가장 극적으로 활용한 예라면 역시 〈프로듀스 101〉 시리즈였다.

‘당신의 소녀·소년에게 투표하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이들은 한번 팬이 되면 쉽게 몰입하게 되는 아이돌 산업의 특성과 마침 세계로 뻗어나가던 케이팝 인기를 등에 업고 거침없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프로그램은 네 차례 시즌을 통해 총 마흔다섯 명의 연습생에게 데뷔의 꿈을 선사했다. 이 가운데 워너원(시즌 2)과 아이즈원(시즌 3)은 가공할 크기의 팬덤으로 연중 화제를 모으며 해당 해의 각종 신인상을 휩쓸었다. 시즌 4를 통해 탄생한 그룹 엑스원도 데뷔 앨범 〈비상:QUANTUM LEAP〉(〈비상:퀀텀 리프〉, 2019)를 52만 장 이상 팔아치우며 역대 신인 그룹 최다 앨범 판매량을 경신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 싶은 가혹한 반전이었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시청한 ‘국프’들의 투표 조작 의혹으로 시작된 사건은 수사가 진행되며 연습생들의 열정 아래 가려졌던 추악한 이면을 하나씩 드러내는 중이다. 조작에 가담한 담당 PD와 CP는 구속되었고, 제작사인 CJ E&M의 고위 간부들 역시 수사와 압수수색 대상이 되었다.

오디션의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진실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든 믿음을 잃은 시청자들의 눈은 이제 〈프로듀스〉 시리즈만이 아닌, 지금껏 우리를 울고 웃게 한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향하고 있다. 잔인한 줄 세우기와 악마의 편집으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온 한국 오디션 프로그램 10년 역사는 이렇게 끝을 모르는 추락과 의혹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자신들이 만들었던 법칙 그대로 살아남거나, 죽거나. 이보다 더 참담한 끝은 없을 것이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