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은 그림

그녀를 봤을 때 나는 헉헉, 하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마라톤 연습을 하다 숨이 차서 잠깐 쉬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내 앞을 지나가는 행인의 티셔츠 문구가 눈에 띄었다.  

I don’t know.
I don’t care.
난 모르겠어. 상관 안 해.

번역하면 그 정도 되는 심플한 두 문장에서 강렬한 메시지가 읽혔다. 반백의 그녀는 뒷모습으로 추정컨대 6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수십 년간 가족에게 자신의 예쁜 것, 소중한 것을 내준 분이 평균적으로 많이 분포된 연령대. 그래서일까, 간결한 영문 문구에서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난 몰라요. 할 만큼 했습니다. 날 내버려둬요. 가족이여, 당신들은 이제 당신들의 길을 알아서 가시라! 티셔츠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만 보니 초로의 그분이 한 손에 무심히 말아 쥐고 있는 건 야구 모자였다. 양손과 어깨 어딜 봐도 가방이 없었다. 둥그스름한 어깨가 더운 여름날의 공기 속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장바구니도, 핸드백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어떤 가방도 메지 않고 후텁지근한 공기를 시원하게 가르며 걷고 있었다. 티셔츠 문구와 어울리는 그녀의 무소유는 내게 유쾌한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I don’t know. I don’t care.

이제 입시철에 본격 접어들었다. 2학기가 시작되면 대입 일정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들은 수시에 대비하는 학생들의 개별 상담 및 지도,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관련한 각종 행정 업무로 매우 바쁘다. 물론 이 계절에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든 건 아무래도 수험생일 것이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심신이 지쳐갈 수험생을 생각하다 문득 지난여름 마주친 그녀가 떠올랐다. 자유로운 산책자처럼 보였던 그녀와 그 가족은 가혹한 입시전을 한참 전에 끝마쳤을까, 아니면 아직 고군분투 중일까. 대입 문제는 예전에 끝마쳤겠지. 제2의 관문인 취업 전쟁이 한창이지만 이번엔 모든 것을 당사자인 자녀에게 맡겨두기로 했을 거야.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본 스쳐간 행인인 그녀에게 자녀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몇 달 만에 소환된 그녀의 짧고 강렬한 이미지에 덧붙여 나는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자녀여, 이제 그대의 길을 알아서 가라

입시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니 수험생을 위한 건강관리법, 막바지 정리를 위한 공부법 등에 대한 정보가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그런 정보를 수험생보다 더 열심히 읽고 자녀에게 뭐 도움이 될 만한 게 없나 촉각을 곤두세우는 학부모들이 전국에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시절, 이맘때면 근심 걱정 가득한 목소리와 얼굴로 학부모들이 나를 찾곤 했다. 그럴 때면 아무리 작고 가벼운 가방을 들고 온 어머니도 표정과 한숨만으로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멋스러운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아버지도, 양손이 자유로운 상태로 온 아버지여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 잔인한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수험생들이 부디 각자 최선을 다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게 된다. 올해는 수험생 자녀 뒤에서 이것저것 챙기느라 자기 자신은 뒷전인 학부모들의 안녕도 빌고 싶다. 그리고 입시가 마무리되면 그들이 두 손에 아무것도 없이 산책하기를 바란다. ‘난 이제 모른단다, 상관 안 할게. 자녀여, 그대는 이제 그대의 길을 알아서 씩씩하게 걸어가라’ 하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산책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기자명 정지은 (서울 신서고등학교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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