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5·18 당시 신군부에 의해 파면당한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의 딸 이향진씨(위)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이향진씨(62)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포 지역 치안 책임자였던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의 둘째 딸이다. 그는 지금도 39년 전 아버지가 고문당하던 보안사 근처에 속옷을 전달하러 갔다가 받은 충격으로 불안증에 시달린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직후 1980년 6월 초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을 보안사로 연행했다. 90일간 감금하고 고문했다. 5·18 시위에 강경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신군부는 그를 파면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그에게 징역 1년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90일 동안 온갖 고초를 당하고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러 하신 말씀은 딱 한마디였다. ‘너희가 부끄러워할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살아가면서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거 없다’.” 그 뒤 이 서장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5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향진씨와 유족들은 아버지의 억울한 피해를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신군부의 비위를 맞추느라 아버지를 매도한 경찰 수뇌부로부터 입은 상처가 컸다. “신군부가 파면하라고 요구하자 치안본부에서는 아버지를 무능한 경찰관으로 매도했다. 5·18 때 도망간 경찰관이라고까지 했다. 내막을 모르는 경찰들도 다들 그렇게 비난했으니 우리 가족은 설 자리가 없었다.”

지난 10월11일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2단독(임효미 부장판사)은 1980년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유예 처분한 이준규 서장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준규 서장 일가족이 오랜 트라우마를 견디고 전두환 신군부가 낙인찍은 ‘무능 경찰’ 딱지를 벗겨내는 데는 39년 세월이 걸렸다. 유족은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애를 먹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에는 역설적으로 전두환씨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전두환씨는 2017년 4월 회고록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5·18민주화운동 폭력 진압의 책임을 경찰에 떠넘겼다. 전씨는 “광주 사태 초기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계엄군이 시위 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5·18의 원인이 된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과 폭력성을 가리고 마치 경찰이 근본 원인이었던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다.

전두환씨의 공세에 경찰도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경찰은 전씨의 왜곡된 주장에 맞서 5·18에 대한 경찰의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남지방경찰청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태스크포스팀(경찰 TF)’이 꾸려졌다. 경찰 TF는 2017년 10월, 5·18민주화운동 당시 경찰 내부 자료와 경찰관 증언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향진 제공1980년 목포경찰서에서 근무할 당시의 고 이준규 서장 모습.

보고서에는 1980년 5월 광주 상황과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및 이준규 목포서장 등이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상세히 담겼다. 경찰 TF는 이어 ‘전두환 신군부가 이준규 서장에게 가한 형벌과 징계가 합당했는지’ 자체 진상조사도 벌였다. 당시 신군부가 계엄군의 폭력 진압을 덮기 위해 이 서장 등 일부 경찰을 희생양으로 삼아 파면했다는 결론이었다. 이 보고서는 2018년 국가기록원에도 등재됐다.

이 서장의 유족들은 국가기록원을 찾아 전두환 신군부가 아버지에게 저지른 악행을 확인했다. 지난해 7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재심을 신청해 마침내 무죄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 서장 “절대 시민에게 발포하지 마라”

평생 아버지의 명예를 내팽개친 경찰을 원망하며 지내온 이향진씨는 “뒤늦었지만 민갑룡 경찰청장 체제에 들어서 경찰이 조직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철두철미한 경찰이었다. “평소 경찰은 시민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을 강조했다.”

전남 장성 출신인 이준규 서장은 28세 때인 1948년 경찰에 입문했다. 한국전쟁 때 좌우 대립 속에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부모와 동생 3명을 잃기도 했다. 해남경찰서장으로 있던 그가 목포로 부임한 때는 1980년 2월이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붕괴된 후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 서울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광주를 거쳐 목포로 번졌다. 특히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처 이후 목포역 광장에는 연일 수만 명이 운집해 ‘계엄 철폐’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구호를 외쳤다. 신군부는 목포 경찰에게도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이준규 서장은 신군부의 진압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대신 바로 상급자인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내린 ‘평화시위 유도와 방어적 진압’ 지시(〈시사IN〉 제611호 ‘도망가는 시위대 뒤쫓지 말라’ 기사 참조)에 따랐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계기로 광주 시위대가 무장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신군부의 광주 고립 작전을 뚫고 직접 광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전하기 위해 전남 지역 곳곳으로 빠져나갔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5월21일 오후 2시15분경 일부 무장한 120명가량의 광주 시민이 고속버스 4대와 승용차 1대에 나눠 타고 목포역에 도착했다. 차량 시위대가 진입하는 도로는 93연대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준규 서장은 시민군이 목포에 진입한다면, 광주 참상이 알려지면서 목포에서도 항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서장은 목포 외곽 주둔 계엄군이던 93연대에 “외부 시위대의 목포 진입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경찰 TF 조사에 따르면 어쩐 일인지 당시 계엄군은 이들의 진입을 막지 않았다.

전남 경찰을 지휘하던 안병하 국장은 공수부대 발포 이후 시민들이 무장해 시가전이 벌어지자, 도경 산하 경찰서장들에게 “경찰 무기를 소산(疏散)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목포역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 서장은 구내방송으로 부하 경찰관들에게 지시했다. “절대 시민을 향한 발포를 금지한다.” 이어 안병하 국장의 지시에 따라 목포 시내 경찰 무기를 안좌도, 고하도 등 시위대가 접근할 수 없는 섬으로 옮겼다. 이동이 어려운 총기는 미리 노리쇠와 공이 등을 분리했다. 시민군 손에 넘어가더라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5.18기념재단 제공1980년 5월20일 광주 시민들이 전두환 신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차량 시위를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준규 서장은 지역 기관장들과 목포역에 있는 시위대 지도부를 만나 협상을 벌였다. 5월22일 오전 이 서장과 목포시장, 목포민주시민투쟁위원장과 목포대학장이 모여서 ‘수습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서장은 광주처럼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와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으니 총기를 반납하고 평화시위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합의가 이뤄져 5월22일부터 목포에서는 총기가 회수되었다.

물론 목포시의 기록(〈목포시사〉)을 보면, 5월21일 오후 5시쯤 목포 시위대는 광주 학살을 외면하고 폭도로 비난하는 데 분노해 목포 MBC를 공격한다. 오후 8시 이후에는 법원, 검찰지청,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이 파손된다. 전체적으로 광주 학살에 분노한 목포 시위대를 상대로 한 이준규 서장의 상황 판단과 평화적 관리 덕에 당시 목포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간에 유혈 총격전이 발생하지 않았다. 3만명까지 운집 인원이 불어났던 목포 항쟁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완전히 진압한 이후에도 하루가량 더 지속됐다. 5월27일 목포역에 무장 시위대가 있는 줄 알고 계엄군이 들이닥쳤지만 정작 아무도 무기를 든 사람이 없어서 자진 해산했다.

〈목포시사〉의 ‘목포관내 사태보고’에 기록된 5·18 전 기간 목포에서 일어난 인명 피해는 사망 1명, 부상자 11명이었다. 공수부대의 강제 진압으로 사망자 다수가 발생한 광주 상황과 비교된다. 5·18 당시 목포에서 이준규 서장이 취한 일련의 대응 조치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시민을 살렸다.

“아버지는 5·18 항쟁이 막을 내린 뒤 광주와 달리 목포에서 시민들의 유혈 참사를 막은 경찰 대응이 표창받을 일인 줄로만 아셨다.” 이 서장은 5월30일 느닷없이 치안본부로부터 직위해제 통보를 받았다. 경찰 TF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씨는 그해 5월30일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직무유기 경찰관 보고’라는 문건에 직접 사인했다. 이준규 서장의 직위는 그날로 해제됐다. ‘강제 진압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직위해제 직후 그는 자녀들이 살던 서울 집으로 올라와 머물다가 6월10일 보안사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불안에 떨고 있던 가족에게 이 서장이 긴급체포돼 서울 모처에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속옷을 가져오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이향진씨는 아버지 속옷을 들고 숙부와 함께 기다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족 면회도 안 시켜줬다. 면회하고 나온 동료 경찰이 아버지가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고,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더라고 하더라. 그때 받은 충격과 불안증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보안사는 이미 직위해제된 이 서장을 5월23일 파면토록 했다. 당시 전남 지역 경찰서장 24명 중 유일한 파면이었다.

군법회의 재판에서 변호사도 못 구해

5·18 당시 목포 지역에서는 유혈 충돌이나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는데도 전두환 신군부는 왜 이 서장을 처벌하고 파면하는 무리수를 두었을까. 이향진씨는 “아버지는 풀려나온 뒤 가족에게 ‘김대중씨와 내통했다는 관계를 대라고 죽도록 고문을 당했다’고 털어놓으셨다”라고 회고했다. 신군부는 이 서장이 시위대 지도부와 평화 시위 및 무기 회수 협상을 벌인 행위를 불순하게 보았다. 신군부는 그를 어떻게든지 사상범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이 서장은 비운의 가족사까지 들어가며 반박했다. 그때마다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는 6·25 때 경찰관이라서 부모님과 동생 3명이 인민군 쪽에 학살당했다. 매우 보수적인 분이었는데도 김대중씨와 엮어 용공 색깔을 씌우려고 했다.”

이향진씨의 남편인 윤성식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군부의 과도한 탄압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선포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음모죄로 구속했다. 신군부 처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해야 그럴듯한 내란의 증거가 된다. 그해 5월27일 경찰의 목포역 앞 마지막 시위 진압작전 때까지 시위가 평화롭게 지속됐다. 아버님은 시위대와 협상을 하는 등 신군부 의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며 큰 미움을 산 것이다.” 당시 지휘자인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은 파면이 아닌 면직 처리를 당했다. 광주·전남 경찰간부 중 유일하게 이준규 서장만 파면됐다. 윤 교수는 이런 정치적 배경 때문에 이준규 서장이 가장 가혹하게 고문을 당했다고 본다.

ⓒ시사IN 조남진이준규씨가 딸 향진씨에게 보낸 편지. 사진은 이향진씨의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이준규씨(왼쪽).

고문을 해도 ‘김대중 연루’ 혐의가 나오지 않자 이 서장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파면 후 군법회의 재판 과정에서 변론해줄 변호사를 구할 수 없었다. 신군부의 서슬에 변호사들이 수임하기를 꺼렸다. “상무대에서 열린 군사재판 최후 변론 과정에서 아버지는 평생 처음으로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군의 요구대로 시위대에 발포해서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내거나 시위대와 경찰이 함께 무장을 해제하고 평화적으로 풀어가는 양자택일의 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뒤 이 서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가족에게 죽고 싶다는 말과 속이 거북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점점 비쩍 말라갔다. 보안사에서 고초를 당한 지 5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5년 초, 그는 위암으로 사망했다.

32년을 경찰관으로 복무했지만 파면당한 공무원이라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약대를 나온 큰딸이 가장 노릇을 했다. 남편의 고초와 사망 충격에 이 서장의 아내도 병을 얻었다. 아버지의 명예를 짓밟는 경찰 주변의 비난과 수군거림에 자녀들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5·18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준규 서장 유족은 비로소 아버지를 5·18 피해자로 등록하고자 했다. 당연히 경찰에서 그 사실을 뒷받침해줄 줄 알았다. “안병하 국장과 우리 유족이 신청했는데 당시 경찰은 ‘민간인 피해자도 아닌 경찰공무원들이 뭐 이런 걸 다 신청하느냐’고 부정적으로 대했다. 또다시 상처만 받고 포기했다.” 침묵과 원망의 세월을 보내던 이준규 서장 유족은 2017년 들어 다시 용기를 내 진실규명 의지를 다졌다. 마침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유족의 지난한 활동 덕분에 5·18 당시 광주·전남에서 안 국장과 이준규 목포서장의 지휘가 시민 희생을 줄였다는 점이 재조명되었다. 이를 묵살하는 경찰에 대한 비난 여론도 거셌다. 2018년 7월 국가보훈처는 이준규 전 서장을 5·18 유공자로 선정했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이준규 서장의 명예를 회복했지만 유족에게는 첫 단추를 끼운 데 불과하다. 파면 처분으로 받지 못한 퇴직금 청구, 순직 인정, 국립현충원 안장 등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서장의 사위인 윤성식 명예교수는 가해자인 신군부는 물론 당시 경찰 수뇌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잘못된 역사는 진상을 밝혀야 한다. 그런 다음, 처벌까지는 어렵더라도 책임 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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