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페미니즘은 우연히 ‘나만의 것’인 줄 알았던 괴로움이 구조 속에서 유사한 위치에 있는 ‘모든 개인들의 것’이었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고백의 모양새는 조금씩 다르지만 마치 한 사람에게서 나온 듯 넓은 원 안에서 포개지곤 한다. 이 양상이 구조의 생김새를 폭로한다.
더 잘하려, 예민하지 않으려, 견디려 애쓰던 사람들은 ‘개안’했다고 느낀다. “다 구조의 문제야. 그러니 네 잘못이 아냐”라는 메시지를 곧 페미니즘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 잘못이 아닌”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삶은 나아질까? 내 고민은 여기서 다시 출발했다.

책임이 없어지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버린 직후는 어떤 책임을 타인에게 모두 넘겨버리게 되지만 실은 핑퐁 게임이다. 어느 날 억압을 박살내며 짜릿해하고, 얼마 후 박살난 조각을 붙들고 억울함과 죄책감의 수렁에 빠지는 일이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에게 동시에 일어났다. 책임 떠넘기기는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일어났다. 페미니즘으로 주변의 관계가 좋아지고 삶이 행복해지기는커녕 상처 입고 소진되고 서로 불신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다음을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스트는 이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영원히 갈등해야만 할까?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게 된 후 몇몇 개인적인 실천을 시도했다. 가령 독점 연애를 그만두고 결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무례한 말, 특히 반말과 외모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를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돌 영상을 소비하지 않기로 했다. 우유와 치킨과 삼겹살을 먹지 않기로 했다. 이 모든 실천을 결심한 데는 구조의 통찰 끝에 찾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중에는 내가 1~2년 이상 실천한 것도 있고, 그만둔 것도 있다.

애초에 텔레비전이 없고, ‘멜론 100’ 차트 밖 매력적인 뮤지션들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우유 대신 두유를 고를 수 있는 커피숍이 있었고, 연애나 외모 말고 다른 소재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점점 많아졌다. 경제적 여유가 늘고 안정적인 주거지가 생겼다. 이렇게 경험에 따라 내가 바뀌어가는 감각을 기록하고 나눌 관계망이 생겨나 실천을 수월하게 했다. 장을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할 시간이 도통 없는 불규칙하고 긴 업무 및 대외활동 시간, 어떤 곳에 갈 때 가해지는 외모에 대한 은근한 규제, 어딜 가나 틀어주는 케이팝 뮤직비디오, 버스 터미널에 앉아 있거나 미용실에만 가도 던져지는 애인 유무와 결혼 여부에 대한 질문은 실천을 어렵게 했고, 어떤 경우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나를 바꾸고 주변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어떻게 해도 나는 구조 속에서 무결한 개인일 수 없었다. 여러 시도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통찰과 요령, 계획이 있다. 성공과 실패에 대해 적어 내려가며 패배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하지 않기’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 뒤 ‘~하기’로 정해 실천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운동하기, 업무 외의 취미 가지기, 하루에 한 시간 이상 햇볕 쐬기. 일상이 붕괴되는 감각이 들 때면 모든 걸 멈추고 밥과 잠과 목·허리 상태를 체크한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함께하면 된다. 지금 할 수 없다면 길게 보고 하면 된다. 이 감각이 중요하다. 어쨌든 나는 잘 안다. 평등한 관계 맺기가 뭔지 알게 된 사람은, 이전과 다른 감각으로 자신의 일상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게 된 사람은, 변화된 주변이 마음에 들어서 세계가 어떤 식의 모습으로 변화하기를 원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을 돌보며 곁을 바꾼 개인들이 끝내 부당한 구조를 남김없이 바꾸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안녕하길.

기자명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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