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라이프치히에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륀더차이트’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 비어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이어진 9번 도로는 독일 동부의 척추와 같다. 베를린에서 출발해 이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표지판에 두 도시의 이름이 등장한다. 라이프치히와 데사우로슬라우. 모두 분단국가 시절 사회주의 정부하에서 발전했고, 똑같이 통일 직후 어려움을 겪었다.

2010년대 들어 두 도시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한 곳은 인구가 유입되며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손꼽히는 반면, 다른 한 곳은 여전히 인구가 줄고 있다. 2000년대 두 도시 모두 가장 큰 숙제는 바로 빈집이었다. 옛 동독 지역 전체에서 빈집은 가장 시급한 사회문제였다.

독일식 빈집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통일이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콘크리트 벽과 철조망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동은 한 방향으로 쏠렸다. 1990년부터 2008년까지 옛 동독 지역 주민 138만여 명이 서독 지역으로 향했다.

작센주 라이프치히시는 통일의 방아쇠를 당긴 지역이다. 1989년 10월9일, 시민 7만여 명이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시위는 곧장 동독 전체로 퍼져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 오늘날 라이프치히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역사적 자산이다. 올해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3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촉발한 통일은 이후 20년간 도시를 매우 위축시켰다. 1987년 55만여 명이던 라이프치히 인구는 2001년 49만여 명으로 감소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인구 75만여 명이던 도시 곳곳에 빈집이 늘었다.

라이프치히시에는 이른바 ‘그륀더차이트’ 양식 건물이 많다. 라이프치히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20세기 초 유행한 이 건축 양식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건물은 속속 비기 시작했다. 도심에서 4㎞ 바깥에 위치한 주거 밀집지역 플라크비츠에도 그륀더차이트 건물이 대다수였다. 빈 건물 유리창은 누군가 던진 돌로 깨졌고, 입구는 나무판자로 막아두었다.

플라크비츠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라이프치히 도시재생 사업이 본격화된 10여 년 전부터다. 플라크비츠 역 인근 ‘카를하이네 거리’가 재생의 핵심 축이 되었다.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빈집 정비가 필수였다. 이때 빈집 정비에 앞장선 이들은 시청이나 연방정부 관계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단체를 설립하고 빈집 소유주와 저렴한 임차료를 원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사업을 벌였다. 소유주에게 저렴한 가격에 임대를 내줄 것을 설득했다. 지방정부도 주민의 자생적인 활동을 지원하며 빈집 정비에 나섰다. 재생이 어려운 집은 철거를 유도했다. 이때 활용한 주요 정책 수단이 주택보유세였다. 슈테판 가이스 라이프치히 시청 도시재생 담당 국장은 “원래 시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빈집은 상대적으로 철거나 정비가 용이하다. 소유주가 따로 있는 집이 문제인데, 이들에게는 소유세를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빈집 정비를 유도했다”라고 설명했다.

빈집을 철거한 자리에 새로 생겨난 공터는 지역 주민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가이스 국장을 따라 방문한 한 공터에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자전거 수리 센터가 있었다. 빈집을 없앤 약 4000㎡ 공터에 가건물을 세웠다. 주민들이 벼룩시장을 여는 등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했다. 주민들은 이 공터를 관리하기 위한 주민 단체를 따로 결성했다.

카를하이네 거리에 위치한 베스트베르크 빌딩은 과거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곳이다. 각종 단체와 작업장, 헌책방 등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 옛 극장을 개조한 영화관과 다양한 문화 시설이 하나둘 카를하이네 거리를 채워나갔다. 라이프치히 시청 관계자들은 문화예술 공간과 아티스트, 그리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재생의 핵심 인물들이라고 설명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빈집에 들어와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이 지역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사IN 신선영데사우로슬라우 시내에 있는 폐쇄된 플라텐바우 앞을 학생들이 지나치고 있다.

도시재생,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

문화예술 분야는 도시재생의 핵심 투자 사업이다. 인구 21만여 명이 살고 있는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시 역시 그 길을 선택했다. 토비아스 크노블리히 에르푸르트시 도시개발국장은 “도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고 젊은 인구를 잡아둘 자생적인 활로를 찾느냐가 도시의 미래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에르푸르트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도시의 재생을 추진했다. 물류업, 문화예술, 그리고 관광산업이다. 각종 물류회사(택배업 등)가 독일 정중앙에 위치한 이 지역에 물류 허브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중세도시의 유산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어 관광업도 점차 넓혀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에르푸르트시가 태생적으로 가진 자산에 가깝다. 크노블리히 국장은 버려진 역을 재생해 예술가들에게 개방한 추크하펜(Der Zughafen) 사업을 소개했다(45쪽 상자 기사 참조). 젊은 인구가 자생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는 생태계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라이프치히나 에르푸르트는 도시 쇠퇴-거버넌스 구축-도시재생-인구 유입이라는 과정을 거친 끝에 활기를 띠고 있다. 이 순환이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젠트리피케이션도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카를하이네 거리 한편에 위치한 한 중고품 매장(Second Hand Store)은 플라크비츠 지역이 최근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매장은 시리아 이주민 출신이던 지역 주민이 운영했는데, 어느 날 가게가 사라지고 대신 여성 의류 매장이 들어섰다.

ⓒ시사IN 신선영에르푸르트 외곽에 위치한 플라텐바우 단지의 전경.

단골 가게를 잃은 동네 토박이 주민들은 새 가게 주인에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고, 계속된 문의에 지친 새 주인이 아예 가게 입구에 ‘(원래 있던 주민은) 우리가 내쫓은 게 아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두어야 했다. 오랫동안 지역민과 관계를 맺었던 상업시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분위기는 이 지역 주택시장에서도 감지된다. 플라크비츠 인근에는 집을 개조해 에어비앤비(민박 플랫폼)에 내놓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임차료를 받는 것보다 숙박료를 받는 게 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민박을 위해 세입자를 내모는 경우도 생겼다. 임차료도 급격하게 오르는 추세다. 주변 지역과의 위화감을 고려해 시청이 대규모 자본 투자를 막고 있지만, 도시재생의 주축이었던 주민들 처지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본의 압력’이 생겼다.

라이프치히나 에르푸르트 사례는 빈집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옛 동독 지역 전반을 보면 도시재생의 효과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2018년 독일 도시별 빈집 비율을 분석한 왼쪽 〈그림〉을 살펴보자. 지도에서 옛 동독 지역은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여전히 빈집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작센안할트주 데사우로슬라우(이하 데사우)시는 여전히 인구 유출에 허덕이는 중소도시를 대표한다. 이곳은 통일 전까지만 해도 인구 10만명 규모를 유지해왔다. 통일 이후 젊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 2018년 8만1237명 수준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전체 인구의 20%가량이 고향을 떠난 셈이다.

데사우는 라이프치히나 베를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결정적 차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연령대다. 도심에서 전동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존한 고령 인구가 눈에 띄게 많았다. 도시를 가득 메운 건축물도 과거 동독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동독을 상징하는 건축물 플라텐바우(Plattenbau)가 많다. 한국식 아파트와 비슷한 형태에 집단 거주하는 방식이다.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독일식 모더니즘 건축은 옛 동독 사회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주도하에 조립식 콘크리트 빌딩 건축으로 발전했다. 한국식 아파트의 먼 친척뻘인 셈이다.

통일 후 플라텐바우는 빠르게 비어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마저 플라텐바우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인의 눈으로는 1인 가구가 거주하기에 적당해 보이는 아파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독일인들 사이에서 플라텐바우는 사회주의 정부의 계획경제를 상징하는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데사우에서는 건물 전체를 폐쇄하거나 리모델링하는 플라텐바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주택 협동조합(Genossen-schaft)’이 시 정부가 보유했던 플라텐바우를 관리하고 정비하며 임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주택 공급 체계를 재정비하는 일에 지역사회가 적극적이지만, 여전히 수요의 문제가 남아 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 문제다.

일부 옛 동독 지역 중소도시는 외부 인구 유입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최근에는 독일로 넘어온 난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2015년부터 옛 동독 지역 도시들 사이에서 비슷한 방안이 논의됐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인구가 늘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로부터 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난민 수용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도시 중 하나가 인구 10만명 규모인 브란덴부르크주 콧부스다.

극우 정당, 빈집 많은 곳에서 선전

하지만 콧부스의 난민 수용 정책은 지역 주민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인구 24만여 명 규모인 작센주 켐니츠도 비슷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들 지역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독일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유독 빈집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선전했다.

빈집 전문가인 만프레트 쿤 박사(라이프니츠 연구소 부원장)는 빈집으로 대표되는 도시 불균형이 정치적 극단주의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쿤 박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극단주의를 등장하게 만들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주로 옛 동독 중에서도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말했다. 난민 수용에 대한 반발과 AfD의 선전, 그리고 인구 감소와 빈집 문제 모두 서로 연관지어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라이프치히나 에르푸르트 같은 도시재생 성공 사례는 한국 빈집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지방정부가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가 도시재생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독일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어렵다. 독일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딜레마가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역시 젊은 인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대도시와 지방 소도시 사이에 점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유럽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유럽 지역 소도시 재생 사업에 재정지원을 펼치는 것도 ‘대도시 쏠림 현상’에 위기감을 느껴서이다.

 

 

 

빈집에서 ‘볼륨을 높여라’

에르푸르트시 출신 독일 가수 클뤼조는 이 지역의 자랑거리다. 2000년대 중반 클뤼조는 매니저이자 자신의 음악적 동료인 안디 벨스코프와 함께 에르푸르트 역 인근에 버려진 창고 건물에서 게릴라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고, 지역 예술가들을 끌어 모았다. 클뤼조와 벨스코프는 이들을 규합하고 버려진 공간을 재조직했다.
축구장 1.5배에 달하는 옛 에르푸르트 역 창고 건물은 오늘날 종합 문화예술 공간인 ‘추크하펜(Der Zughafen, 철도 항구라는 의미)’으로 정비됐다. 낡은 건물에 모인 아티스트들은 직접 이 공간을 양조장, 공연장, 작업실, 전시장으로 개조했다. 에르푸르트 시청 역시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아예 역 인근 재개발 계획(ICE-CITY)에 추크하펜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기는 내용을 포함했다.

 

ⓒ시사IN 신선영에르푸르트 추크하펜을 이끌고 있는 안디 벨스코프 씨.
ⓒ시사IN 신선영데사우 청년단체를 이끌고 있는 라우라 에틀리히 씨와 야스민 셀린 가노우히 씨.

시 관계자들은 자발적인 아티스트의 생태계가 장기적으로 이 지역 젊은 인구의 유출을 막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인구 유출에 허덕이는 작은 중소도시에서도 의미 있는 노력이 이어진다. 데사우 토박이 출신 라우라 에틀리히 씨와 야스민 셀린 가노우히 씨는 데사우시와 몇몇 재단의 도움을 얻어 시내 빈 점포를 얻었다. ‘Zeig was du machst’라는 지역 청년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지역 청소년 단체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워크숍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지역에 산재한 빈집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고, 지역 청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물리적 구심점을 만들고 싶었다. 이들은 현재 데사우 청소년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을 개발하는 일과 함께 각종 지역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에틀리히 씨는 현재 포츠담에 있는 대학에 재학 중이지만, 틈날 때마다 데사우로 돌아와 이 지역 젊은이들과 다양한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재생이든 회복이든, 결국은 사람이 모여야 한다. 도시에 인구를 끌어올 수는 없어도 결속력을 높이는 건 가능하다. 에르푸르트와 데사우 모두 그런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 ‘빈집 프로젝트 페이지(house.sisain.co.kr)’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없이 번지는 도시의 질병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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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라이프치히·에르푸르트·데사우로슬라우/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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