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2886071/164오른쪽 안경 쓴 이가 김흥겸. 맨 왼쪽은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송영길 민주당 의원.

1980년대 대학가의 노래 가운데 ‘혀 짤린 하나님’이라는 노래가 있어. 하나님을 부르긴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는 거리가 멀지.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전지전능의 하나님은커녕, 혀가 잘리고 얼굴에 화상을 입은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실컷 욕보인 다음, 노래는 고백한다.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노래는 다시 고함친다.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이 노래를 만든 이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81학번 김흥겸이라는 사람이지. 그는 다소 특이한 신입생이었어.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 김흥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해. “집 근처에 창녀들이 사는데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어. 아니면 교도소에서 재소자들 살피는 일을 하고 싶어. 내 이름 대신 나는 나 스스로 형(螢)으로 부르곤 해. 반딧불 형이라는 한자야(숙명여대 김응교 교수 회고).” 성경 속의 예수 역시 창녀와 죄인의 친구이긴 했다만 신입생 환영회에서 ‘창녀들의 친구, 재소자들의 보호자’를 희망사항으로 삼는 신학생이 어디 그리 흔했을까.

그는 딴따라 기질이 충만한 사람이었어. 동료 신학생들과 더불어 전국 대학생 복음성가경연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타기도 했으니까. 쾌활하고 음악 좋아하던 신학생 김흥겸은 동료들과 함께 농촌 교회 교육전도사 직을 맡았는데 그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지역 곳곳에 널린 사회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해. 동료였던 김응교 교수는 교회의 풍금을 뚱땅거리면서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부르는 김흥겸을 목격하게 된다. 그게 바로 ‘혀 짤린 하나님(정식 제목은 ‘민중의 아버지’)’이었지.

방치된 농촌의 아이들, 살기 위해 매춘에 나섰던 밑바닥 여인들의 삶은 그에게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반딧불을 자처하던 청년은 이 노래를 통해 자그마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빛을 지펴내게 돼. 이윽고 이 청년은 노래를 넘어선 절규로 세상과 격렬하게 충돌한단다. 1983년 교내 채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경건한 예배당을 발칵 뒤집어놓은 거야.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아마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을 번쩍 떴을 거야.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를 부르짖으며 ‘죄인 코스프레’를 기본으로 하던 기독교 청년들에게 이런 기도문은 발칙함을 넘어선 도발이었으니까. 김흥겸은 기도를 이어간다.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린 아무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뭘 했습니까?”

이쯤 되면 모든 학생들은 김흥겸이 대학 캠퍼스에 상주하던 형사들에게 머리채 잡혀서 끌려 나갈 풍경을 불안하게 상상했겠지. 김흥겸은 내처 내질러버린다. “독재자의 종들이 백주 대낮에 수천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뭘 했냐고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는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것도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

이 가공할 신학생은 같은 해 있었던 마당극 〈누가 예수를?〉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역할을 맡게 돼. 온 캠퍼스를 예수 수난의 무대로 바꿔놓았던 이 마당극에서 극중 예수는 사복형사에게 체포되고 검은 승용차에 실려가 교문 앞 ‘로마 법정’으로 향한다. 교문 앞에는 엄청난 규모의 전경들이 대기 중이었어. 그들의 방석모와 방패는 ‘로마 군단’의 형상을 재연하고 있었지. 언제 이 로마 군단이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위험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어. “전두환은 물러가라!”

정문 앞에서 예수로 분한 김흥겸을 채찍질할 때부터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다. “몇몇 여학생들이 흐느끼기 시작하고, 골고다를 향한 예수의 행진이 출발했을 때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이 되고자 자원했는지, 그들을 밀쳐내느라 힘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전진택 목사의 회고).” 어느새 골고다의 예수가 아닌 광주 망월동의 예수가 되어버린 김흥겸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가운데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빠가 아는 찬송가 중 가장 ‘신실한’ 노래 ‘혀 짤린 하나님’이었지.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졸업 시즌, 다른 사람들이 여러 고명한 신학자와 목사들의 저작에 파묻혀 있을 때 김흥겸은 공동번역 성서만 뒤적이고 있었다고 해. 도대체 뭘 쓰느냐고 묻는 질문에 김흥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와 어떻게 투쟁했는지, 어떻게 탈출했는지 오로지 성경만 보고 졸업논문을 써보려고. 모세의 10단계 투쟁에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430년 만에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걸 분석해보려고.” 그는 이미 반딧불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으게 만드는 모닥불이었고 사람들 마음의 화덕을 달구는 잉걸불이 돼 있었지.

그는 학창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서울 관악구 신림7동의 낙골교회 전도사로 일했어. 그 동네는 원래 공동묘지였던 자리를 밀어버린 시유지에다가 청계천 주변에서 철거된 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곳으로, 채 수습하지 못한 뼛가루들이 굴러다닌다고 해서 ‘낙골’이라는 별칭이 붙었지. 그곳에서 몇 년을 봉사한 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했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영등포역 앞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면서는 노점상 아줌마와 젓가락 장단을 하며 어울렸고, 신대방동 철거 현장에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석 달간 콩밥을 먹었다. 극단의 배우로, 배추 장사로, 음반기획자로 그야말로 삶의 바닥을 몸으로 쓸어내던 그에게 위암 선고가 닥친 것은 1995년이었어. 암은 점점 더 깊어갔고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그와 인연이 깊었던 오충일 목사는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드물 일 하나를 제안하게 돼. “흥겸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치르자.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건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11월 가쁜 숨이긴 하지만 멀쩡히 숨을 쉬고, 창백하긴 하지만 아직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산 사람의 장례식이 열렸다. ‘고인’은 휠체어에 앉아 문상객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치 부활한 사람처럼, 다시 살아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97년 1월21일 그가 회개하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던 하나님 곁으로 갔어.

오늘날 광화문 앞에서 목사 같지 않은 목사들의 장광설이 요란한 것은 너도 익히 들었으리라 본다. 개신교가 그 엄청난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지녀온 건 “끝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고 말하며 욕망에 저항하고 권세에 맞섰던 소수가 있었기 때문이야. ‘불신지옥 예수천당’ 따위의 주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를 드리며, 왜곡된 현실과 약한 자를 짓밟는 억압자들에 맞서 싸웠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야. 반딧불을 자처했던 신학생 김흥겸의 역사 또한 그것을 증명한다고 아빠는 믿는다. 그가 천국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하자꾸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