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군경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 유치준씨의 아들 유성국씨(위)는 “가해자가 나타나면 용서하겠다”라고 말한다.

1979년 10월18일 오후 6시께, 경남 마산시 봉암동에서 목수 일을 하던 유치준씨(당시 51세)는 평소처럼 퇴근길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산호동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를 만났다. 시위대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유치준씨는 집으로 가는 길이 경찰에 막히자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경찰은 강제진압에 나섰다. 분노한 시위대는 공화당 마산지구당사와 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마산경찰서장은 39사단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밤 11시 장갑차 4대가 경찰서에 배치됐고 군 병력이 마산 시내에 주둔했다. 곧장 군경 합동 진압작전이 펼쳐졌다. 군경은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진압 곤봉에 안면부와 후두부를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시민이 있었다. 바로 유치준씨였다. 그는 이날 밤 마산시 산호동 네거리 시위 현장 인근에서 숨졌다. 경찰은 새벽에 유씨의 시신을 회수했다. 소지품에서 주민등록증을 확보해 신원을 파악했다. 하지만 경찰은 유족에게 연락하는 대신 유씨를 변사자로 처리한 뒤 인근 야산에 몰래 묻었다.

유씨가 숨지기 하루 전인 10월17일 밤늦게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회의’라는 명칭의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국무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특별지시를 내렸다. “(시위대가) 난동을 부리면 초기에 타격해 진압하라.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유언비어를 막기 위해 대외비로 처리하라.” 그런 분위기에서 유씨는 숨진 뒤 암매장된 것이다.

가족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그의 귀가를 기다렸다. 유씨의 아내와 아들 유성국씨(당시 19세)는 이튿날 새벽부터 마산경찰서 유치장과 파출소를 찾아다녔다. 연행자 가운데 아버지는 없었다. 가족은 매일 마산 시내 파출소, 교도소, 병원 시신 안치실 등을 찾아다녔다.

경찰, 10·26 터지자 암매장한 시신 내줘

유치준씨가 사라진 지 8일째 되던 날 10·26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경찰의 태도가 바뀌었다. 1979년 11월1일, 마산경찰서에서 유씨 가족을 불렀다. 유성국씨는 당시 상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암매장된 곳은 경찰서에서 가까운 야산이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흰 천으로 감싸놓았다.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은 생전에 입은 옷 그대로이고 구덩이에 흙으로 덮여 있더라.”

성국씨는 당시 경찰에 왜 아버지 신분증을 확인하고도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암매장했느냐고 따졌다. 경찰 대답은 궁색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묻고 난 후 뒤늦게 도시락 안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견했다고 변명했다. 마산에서 변사자나 행려 사망자가 발생하면 마산의료원에 안치하도록 돼 있는데 이를 어기고 직접 암매장한 이유를 묻자 경찰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 시신은 영원히 못 찾았을 거다. 아버지를 암매장해 영구 은폐를 시도했지만 곧바로 유신정권이 무너졌으니 경찰이 당황한 거다.”

유족에게 시신을 인계한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종용했다. 장례식을 치를 겨를도 없었다. 유족은 시신 훼손과 부패가 심해 수의를 입히지도 못한 채 화장했고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이후 유족은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으니 진상규명과 국가배상이 이뤄질 것으로 여겼다.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유족의 바람은 깨졌다. 유성국씨는 20대를 방황과 좌절 속에 보내야 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운동 재조명과 명예회복 열기가 고조됐다. 유씨 가족의 진상규명 바람은 더디게 이뤄졌다. “역사적으로 활발하게 재조명된 4·3 항쟁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견줘볼 때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아 솔직히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2010년 유성국씨는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찾아 나섰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아버지 사망사건을 신고했다. 이 단체와 함께 경찰서, 국립문서보관소 등을 찾아다녔다. 성국씨의 활동으로 비로소 ‘부마민주항쟁 때 과잉진압 사망자를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9월5일 유성국씨는 40년 만에 가슴에 쌓아둔 한을 풀었다. 지난 9년 동안 뛰어온 그의 노력에 국무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가 화답했다. 위원회는 이날 유치준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공식 의결했다. “고 유치준씨는 사인이 물리적 타격에 의한 외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당시 시위가 고인의 퇴근시간 이후 사망 장소 인근에서 격렬하게 발생했다는 점, 경찰은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했다고 담당 검사에게 보고했음에도 실제로는 유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암매장함으로써 사망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고인의 사망이 부마민주항쟁의 시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인정된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부마민주항쟁(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40년이 흐르도록 사망자와 부상자 실태조차 규명되지 않고 있는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좌표는 어디일까.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시민·학생 수만명이 박정희 정권에 맞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1979년 임계치에 도달해 폭발 직전이었다. 체포, 고문, 가택연금 등 탄압 속에서도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 진영의 저항이 고조됐다. 그해 8월 서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폐쇄에 반발해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의 신민당사 진입으로 YH 노동자 김경숙씨가 추락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10월 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며 박정희 유신 독재를 비판했다. 10월4일 공화당은 김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변칙으로 통과시켰다. 이런 폭압적 조치 탓에 유신체제에 대한 염증이 높아져갔다. 부산대학교에서 대규모 반독재 시위가 촉발됐다. 10월16일 부산대 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는 도심으로 번졌고, 10월18일에는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부산·마산 일원에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부산과 마산에서 각각 1058명, 505명이 연행되었으며, 87명이 군법회의에 넘겨져 20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제5공수여단 병력이 투입된 부산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부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마산 시위 과정에서는 군경 합동 진압작전으로 현재까지 1명 사망(유치준씨), 2명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 있다. 사망 추정 행방불명자 2명은 대학생 1명(대진백화점 앞)과 또 다른 학생으로 추정되는 청년 1명(공화당사 앞)이다. 두 사람 모두 10월18일 저녁 마산 시내 대규모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 곤봉에 맞아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유치준씨와 비슷하게 시위 진압 도중 사망해 암매장되었을 것으로 시민단체는 추정한다.

부마민주항쟁 기간은 닷새였지만 사실상 유신독재의 붕괴를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은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부마민주항쟁이 진압된 지 6일 만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다.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 부장은 “박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마산 같은 사태에 대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차지철 경호실장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언급하며 ‘데모 대원 100만~200만명 정도를 죽인다고 해도 까딱할 것 있습니까’라고 얘기했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이듬해 발생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에 참석해 처음으로 ‘부마민주항쟁’이라고 부르기 전까지 ‘부마 사태’ 또는 ‘부마 사건’으로 불렸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와 진상규명 활동은 2000년대 들어서야 시작되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은 난항을 겪었다. 부마민주항쟁보상법이 2013년 5월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14년에는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다. 부마민주항쟁 정신과 동떨어진 친박 인사나 뉴라이트 계열 인물들이 위원회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유치준씨 아들 유성국씨는 박근혜 정부 당시 위원회 때 국가기록원을 뒤져 아버지에 관한 검찰 검시 기록을 찾아 제출했다. 경찰이 검사에게 사망 당일 유족에게 시신을 인계했다고 거짓 보고하고 몰래 암매장해버린 은폐 증거가 담겨 있었다. “증거 기록을 들이대도 위원회에서는 아버지를 행려사망자로 분류해놓았더라.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박정희)가 죽이고 딸(박근혜)이 진실을 덮은 격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자 바로 선 ‘위원회’

문재인 정부 이후에야 위원회가 바로 섰다.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참가자와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할 수 있는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성국씨는 “박근혜 정부 때 위원회는 피해자 조사를 딱 한 번 내려와 조사하는 시늉을 벌인 뒤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번 정부 들어 바뀐 조사위원이 스무 번씩 내려와서 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경찰, 군부대, 검찰 등을 상대로 꼼꼼히 조사해간 뒤 공식 사망자로 의결해줬다”라고 말했다.

최근 위원회는 관련 지자체와 단체,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부마민주항쟁 최초 발생일인 10월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해 지난 9월17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올해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부마민주항쟁 기념행사가 열린다. 40년 만에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 유족으로 공식 인정받은 유성국씨는 올해 부산에서 열리는 정부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감회가 남다르다. “위원회 의결 소식을 어머니께 알려드렸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더라.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고 암매장한 가해자를 특정해내지 못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가해자가 나타나 진실을 말하면 용서할 생각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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