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연쇄살인사건을 취재한 기사. 윤씨는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했다. 몇 번이고 물어도 같은 답이었다. 16년 전 일이다.

2003년 5월은 영화 〈살인의 추억〉이 막 개봉한 때였다. 영화의 완성도를 볼 때 흥행할 가능성이 높았고, 잊혔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다시 국민적 관심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필자가 화성 현지 르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였다.

당시 화성경찰서에는 1차에서 10차에 걸친 연쇄살인사건을 총괄하는 수사본부가 남아 있었다. 1987년부터 화성경찰서 수사계에서 일하며 직접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형사도 강력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8차 사건도 맡았던 이다.

8차 사건은 모방범죄로 이미 범인이 교도소에 있었다. 필자는 어쩌면 그 8차 사건 범인으로 확정된 윤 아무개씨가 나머지 사건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형사들은 이런 가능성을 일축했다. 8차 사건은 모방범죄라고 딱 잘라 말하며 “안 그래도 수사진이 며칠 전에 교도소에 가서 직접 면회했다”라고 전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걔 제정신이 아냐. 헛소리만 하고 있어.” 형사는 경멸 어린 표현을 쓰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필자가 직접 취재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시간 낭비다”라며 강하게 말렸다. 그래서 더 호기심이 났다.

“정말 당신이 한 범행이 아닌가?”

청주교도소를 찾아가 면회 신청을 했다. 윤씨와는 친구 사이라고 둘러댔다. 요즘 기준으로 취재 윤리에 어긋나는 거짓말이라면 할 말이 없다.

면회실에 윤씨가 나왔다. 1989년 체포 당시 언론에 나온 사진보다는 살이 붙은 상태였다. 기자라고 솔직히 밝히고 사정을 길게 설명했다. 6차 이전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났음을 알리며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을 사실이 없느냐고 설득했다. 윤씨는 단칼에 다른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8차 사건 자체도 자신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단호한 태도에 솔직히 당황했다. “대법원까지 세 번이나 재판을 했는데 결론이 똑같지 않았나?” 윤씨는 이에 대해 자신처럼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놈이 어디다 하소연하냐고, 그땐 국선 변호인을 쓸 수밖에 없었고,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윤씨는 긴장하거나 간절히 호소하는 목소리였다기보다는 여유 있게 웃으면서 툭툭 한마디씩 답하는 그런 어조였다고 기억한다.

그에게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모순을 따져 물었다. 체모 속 중금속 분석 결과에 관해선 농기계 수리공 일을 하면서 생긴 우연일 뿐이었다고 해명했다. 피해자와의 관계에 대해선 사망한 여학생의 오빠와는 친구였지만, 피해자 여학생은 본 적조차 없다고 했다. 경찰 수사 중 가혹행위가 있었냐고 물으니 당연하다고, 맞았다고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고문이 있었는지를 묘사해달라는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지금 구구절절 묘사하기가 싫다”라면서 꺼렸다.

취재의 계기가 되었던 영화 〈살인의 추억〉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서 그런 영화가 개봉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영화 개봉 자체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어떤 생각으로 그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가족들을 더 힘들게만 할 뿐이다.”

그는 자신이 5년쯤 뒤에 가석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사회에 나오면 뭘 할 거냐는 질문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여기서 재봉을 배우고 있으니 그 기술이나 살릴까 한다”라고 답했다. 면회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자는 개인 전화번호를 주고 혹시 할 말이 있다면 여기로 전화를 달라고 부탁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화성경찰서에 돌아가 면회 내용을 전했더니 형사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냉소를 보냈다. 한 형사는 “걔는 또라이”라며 폄하했다. 서울에 돌아와 면회 내용을 기사로 냈다. 제목은 ‘사람 죽인 적 없다’였다. 기사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도소에서 외부로 전화를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전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부분 신변잡기에 관한 얘기였다. 그 뒤로도 몇 번 전화 통화를 했다. 나는 종종 “정말 당신이 한 범행이 아닌가?”라고 물었고 답은 한결같았다. 쳇바퀴 같은 대화가 오갔다.

언젠가부터 내가 그의 전화를 놓치거나 다정하게 받지 못하는 일이 늘었다. 그러다 연락이 끊겼다. 돌이켜보면 나는 좀 더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다. 그는 외로워했고, 이 세상에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는 수십 년째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때는 아무도 듣지 않았고 지금은 모두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

기자명 신호철 (〈시사IN〉 전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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