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자료1988년 9월16일 경찰이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피해자 박 아무개양의 집 안팎을 수사하고 있다.

동네 주민들에게는 경운기 수리를 잘하던 인물로 통했다. “다리는 절어도 손재주가 좋았거든.” 백발이 된 이웃 유 아무개씨(81)가 회상했다. 지금의 화성시 진안동이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로 불렸던 1988년, 그의 옆집에 윤 아무개씨(당시 21세)가 살았다. 윤씨는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절었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그를 딱하게 여기던 이웃이 많았다. 동네 농기구 수리 업체 사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윤씨는 그곳에 묵으며 경운기를 수리했다.

경찰들이 윤씨가 사는 진안2리 사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88년 가을이었다. 1988년 9월16일 진안1리에 살던 중학생 박 아무개양(13)이 집에서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여덟 번째 희생자였다. 사건 현장은 윤씨가 일한 농기구 수리 업체에서 1㎞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근처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유씨는 그 시절 경찰을 자주 마주쳤다. “1년 동안 형사들이 사거리를 뱅뱅 돌더라고. 걔(윤씨)를 감시하러 왔던 것 같아.” 1989년 7월 윤씨는 경찰에 체포됐다. 주민들이 놀랐다. 이웃이었던 김 아무개씨(79)는 “걔가 그럴 애가 전혀 아닌데.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체모가 일치한다고 하니까 긴가민가했지”라고 말했다.

ⓒ시사IN 자료1988년 9월16일 경찰이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피해자 박 아무개양의 집 안팎을 수사하고 있다.

윤씨는 1989년 7월 강간살해 혐의로 구속돼 3개월 뒤 열린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0년부터 수감된 그는 모범수로 감형받아 19년 만인 2009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8차 사건은 ‘모방 범죄’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사건과 범행 수법이 달랐다. 다른 사건은 주로 범행 장소가 농수로, 야산 등 야외였고, 옷가지로 매듭을 만들어 피해자의 손발을 묶는 등 범행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8차 사건은 피해자의 방에서 벌어졌고, 시신에는 목을 조른 흔적만 있을 뿐 범인의 ‘시그니처(범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정한 수법)’가 발견되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8차 사건에 대한 오랜 침묵이 30년 만에 깨졌다. 8차 사건에 대한 새로운 진술이 나온 것이다. 부산 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 중인 이춘재(56)였다. 지난 7월부터 화성 연쇄살인사건 증거물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DNA 감식이 다시 이루어지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됐다. 5차, 7차, 9차 사건에 이어 4차 사건까지 자신의 DNA가 검출되자 이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성 사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8차 사건도 그중에 있었다.

8차 사건 당시 윤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는 현장에 남은 체모 때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한 음모 6개를 포함해 체모 8개를 국과수와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감정의뢰했다.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을 통해 체모의 성분을 분석하는 과학수사가 국내 최초로 이루어졌다. 체모를 원자로에 넣어 방사선을 발사해 성분 원소를 분석하는 기법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 과학수사 기법으로 이뤄지다가 지금은 DNA 감식 기술에 밀려 사라졌다. 요즘은 고순도 실리콘 등 산업재료 소재의 불순물 정량을 분석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당시 현장에 남은 체모에서 티타늄 성분이 13.7ppm으로 높게 검출되었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범인이 금속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추측했다. 태안읍 일대의 영구자석 공장, 용접봉 사용 업체, 램프필라멘트 공장 등 32개 업체에서 일하는 465명의 체모를 채취했다. 당시 전기부품 회사에 다녔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도 그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혈액형이 B형인 271명을 대상으로 집중 조사를 벌였다. 체모에서 분석된 혈액형이 B형이었기 때문이다. 이웃이었던 유 아무개씨는 “그때 범인을 잡는다고 동네 젊은 사람들은 거의 다 체모를 뽑았다”라고 회고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춘재의 경우 두 번 체모를 채취했다. 첫 번째 감정 결과는 B형, 두 번째는 O형으로 나오면서 수사 대상에서 빠졌다(이씨 혈액형은 O형이다). 윤씨의 경우 경찰이 체모를 네 차례 채취해 국과수에 감정 의뢰했다. 최종적으로 수사 대상에 남은 윤씨의 체모를 두고 방사성동위원소 분석을 진행했다. 1989년 7월25일 국과수는 윤씨의 체모와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를 동일인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의 한계

1989년 10월20일 열린 1심 재판부(유창석 부장판사)는 윤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윤씨는 사건 당일인 1988년 9월16일 새벽 1시경 ‘신체적 불구로 인한 열등의식에 참기 힘든 우울한 심정으로’ 동네를 배회하던 중 피해자의 집 앞에 이르러 ‘부녀자를 강간할 마음을 먹고’ 범죄를 저질렀다. 윤씨의 진술 조서 외에도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의 감정 결과가 국내에서 처음 증거로 채택되며 주목받았다. 당시 언론도 앞다투어 과학수사 기법을 보도했다. ‘화성 살인, 체모 증거 채택될까(〈동아일보〉 1989년 7월29일)’ 같은 기사가 대표적이다. DNA 감식 기술이 국내에 도입되기 전이었다.

반전이 일어났다. 윤씨가 항소하며 경찰의 가혹행위를 폭로했다. 2심 판결문에 따르면 윤씨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경찰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로 진술하였다’고 주장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관련된 경찰 조사에서 각종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이 흘러나오던 시기였다. 수사 이후 풀려난 30대 남성이 자살하는가 하면 9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검찰에 송치된 윤 아무개씨(당시 19세)가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다.

1990년 2월15일 서울고등법원(판사 윤재식·김영훈·최은수)은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 어떠한 가혹행위를 당하였다고 볼 만한 아무런 자료도 없다”라며 특히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피고인의 음모를 분석한 소견서를 보면 범죄사실을 인정하기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윤씨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1990년 5월8일 대법원(대법관 김상원·이회창, 배석 김주한)은 기각했다.

이춘재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30여 년 만에 이춘재의 진술이 나오며 윤씨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의 강압 수사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고 이 과정에서 고문과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2심 당시 항소 이유와 일치한다. 윤씨는 재심을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1999년)’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2000년)’의 재심 변호를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가 함께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심의 관건은 기록이다. 이윤정 법심리학 박사는 “재심 사유는 증거가 명백하거나 새로운 것일 때 인정된다. 당시 채택된 증거가 부실했다면 가능성이 있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에서처럼 진범의 자백을 법원이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의 증거물은 폐기된 상태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담당하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형사과 관계자는 “당시 주요 수사 기록들은 검찰로 송치됐고, 보존기한 20년이 지나서 폐기됐다. 이후 만들어진 수사 보고 기록들은 남아 있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반기수 수사본부장은 10월10일 기자들을 만나 “이춘재가 8차 사건에 대해 범인만 알 수 있는 유의미한 진술을 했다”라고 밝혔다. 반 본부장은 “당시 수사 형사들은 국과수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 분석 결과를 믿고 윤씨를 불러 조사했기 때문에 고문할 필요가 없었다고 진술한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윤씨가 고문을 했다고 지목한 형사들을 조사하고 있다. 당시 과학수사 기법으로 주목됐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기법 자체로는 정확도가 높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 혈액형, 지문 분석, 국과수 분석 등 정황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국과수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 분석 결과에 대한 재검증을 요청했다. 30년간 무죄를 주장해온 윤씨가 또다시 긴 싸움을 앞두고 있다.

기자명 화성·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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