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경 제공재일한국인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정승연씨.

정부가 1960년대 초부터 제주도에 감귤 재배를 권장하고, 1968년부터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도 전역에 감귤 과원 조성을 적극 장려하면서 제주도에 감귤 재배 선풍이 불었다. 그러나 감귤 묘목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를 해결해준 이들이 일본의 재일 제주인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초까지 재일 제주인들이 기증한 양질의 감귤 묘목 덕분에 제주도는 감귤의 고장이 될 수 있었고 경제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1965년 도쿄의 재일 제주인 단체 ‘제주개발협회’의 사무장으로 취직한 정승연씨의 주요 업무도 감귤 묘목 보내기 사업이었다. 그가 묘목을 가지고 제주에 들어가면 ‘제주개발협회 사무장 정승연 입도’라는 신문기사가 날 정도였다. 1970년대 초까지 그의 담당하에 제주로 보낸 묘목은 약 100만 본에 이르렀고, 그 경제적 가치는 수백억원에 달한다. 묘목 기증만이 아니었다. 제주도의 기술연수팀을 초청해 감귤시험장 안내 등 기술지도 연수를 위한 협력도 아끼지 않았다.

정승연은 제주도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고 싶어 아버지가 사는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행 밀항선을 타기 위해 처음 제주 밖으로 나온 그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기보다 제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의 경제발전과 도민 삶의 질 향상에 도움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어렵게 진학한 대학원까지 포기하고 사업에 매진했다. 1968년 결혼을 하고 오사카로 이사한 후에도 그는 ‘재일본 제주도민회’에서 같은 업무를 담당했다.

1972년 4월의 그날도 정승연은 재일 제주인들이 기증한 감귤 묘목을 제주도에 보낸 뒤, 임신한 아내와 세 살배기 딸에게 금방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장대비 내리는 제주시청에서 감귤과 방풍림의 묘목 박스를 확인하고 있을 때 검은색 지프차가 서더니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3~4명이 내려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를 제주신문사 근처로 끌고 갔다. 그곳이 육군보안사 제주 분실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에 갇혀서 쉴 새 없이 매질을 당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쓰고 또 쓰고, 호세 대학의 동창이며 선후배 등 아는 이름이라면 죄다 말해야 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옷을 벗기고 손발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서는 구타하고 물고문을 해댔다.

그는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하며 밀입북한 적이 있다는 허위 진술서를 작성한 뒤, 서울로 이송되었다. 다시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모처 안가에 감금당했다. 정승연이 검찰로 송치된 것은 보안사로 끌려간 지 약 1년 후인 1973년 4월이었다. 그해 12월 말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이 확정되었다. 제주개발협회에서 진행한 감귤 묘목 기증을 위한 제주도 방문은 ‘국내 침투’가 되었고, 고향 근처 모슬포항 관광은 ‘군사기밀 탐지’로, 어머니가 있는 본가에서 사람들을 만난 것은 ‘여론 수집’으로 둔갑해, 정승연은 마침내 간첩이 되었다.

대통령은 사과했으나 검찰은 상고

그가 보안사 안가에 불법 감금된 1년, 그리고 8년의 옥살이 동안, 제주도의 어머니와 일본에 있던 아버지는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아 헤매고 간첩이 된 아들을 구해보겠다며 전 재산을 썼다. 아버지는 결국 큰아들이 석방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정승연은 대전교도소에서 가석방되고서야 초등학생이 된 아들과 처음 만났다. 어느덧 쉰이 된 그의 딸은 아직도 ‘아버지’라고 쉽게 부르지 못한다. 부녀 관계가 나빠서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그에게서 빼앗아간 아버지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 제공문재인 대통령이 6월27일 재일동포 간담회에서 이철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대표(오른쪽)와 악수했다.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정승연은 먼저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재일한국인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2016년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6월27일 서울고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같은 날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오사카에서 열린 만찬 간담회 때 국가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재일한국인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판결을 방청하기 위해 서울에 온 조작 사건 피해자들과 무죄판결 축하 모임을 하던 정승연은 그 소식을 듣고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검찰이 ‘상고’를 했다. 일주일 후 검찰은 판결에 불복해 상고함으로써 그에게 ‘간첩’이라는 낙인을 다시 찍은 것이다.

1973년 1심 검찰 구형 전날, 담당 변호사는 정승연에게 “극형을 구형할 텐데, 이런 재판은 이미 시나리오가 다 짜여 있는 거니까 너무 동요하지 말라”고 했단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법원의 판결에 대해 항소, 상고했다. 그 후 2016년에도 검찰은 법적 안전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으므로 재심 청구를 기각해달라는 의견요청서를 제출했다. 2017년 재심 개시 결정에 즉시 항고장을 제출하고, 2019년 무죄판결에 불복해 그를 괴롭혔다. 현직 대통령이 사과하고, 상처 치유를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한국 사회는 성숙해졌다. 그러나 검찰은 재심 공판에서 제대로 된 심문 한번 하지 않고 상고를 했다.

여든 살이 넘은 정승연은 검찰이 증거와 사실에 따라 합리적 추론을 해서 결론을 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하면 재일한국인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김오자(1975년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 2019년 8월 고등법원 무죄 확정)와 김승효(1974년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 2018년 9월 고등법원 무죄 확정)의 재심 담당 검사처럼 무죄를 구형할 수밖에 없다.

재일한국인 ‘간첩’조작 사건 재심은 2009년부터 시작되어 9월 말 현재 37명(필자 조사)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검찰은 관련 재판의 판결 전부에 대해 상소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불법 구금이나 고문에 의해 제대로 범죄가 입증되지 않은 채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상소 포기가 이어지고 있다.

2017년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검찰이 적법 절차 준수와 인권 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올해 6월 말 대검은 일률적인 상소를 지양하고 유죄를 인정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상소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과거사 사건 공판 실무 매뉴얼도 마련했다.

하지만 검찰은 서성수·김태홍·정승연의 재심 무죄판결에 상고장을 냈다. 세 사람 모두 민간인을 수사할 권한이 없는 보안사가 체포·수사했는데도 과거 검찰은 이를 묵인하고 방조했고, 지금은 검찰이 재심 과정을 지연시키며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다시 상처를 주고 있다.

검찰의 상고로 정승연의 재심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지난 9월25일 재일한국인 정승연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간첩 누명을 벗기까지 46년이 걸렸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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