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후지모토 다쿠미 촬영1970년 부산 중구 바닷가에서 작업하는잠수부의 모습.

기술에도 고향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술이나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고 이야기되었다. 기술과 자본은 중립적이며 냉혹한 계산에 따라 움직이기에 우열만 있을 뿐이었다. 한·일 갈등 이후 한국산과 일본산을 나누고 국적을 구분하는 세태를 보면 냉혹한 자본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게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였는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흔히 ‘머구리’라고 부르는 헬멧식 잠수기 어업 기술의 전파에 관한 이야기다. 머구리는 ‘잠수’를 의미하는 일본어 ‘潛り(모구리)’에서 유래했다. 부산과 전남 여수에 있는 ‘잠수기수산업협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많은 한국인 잠수부도 잠수기 기술이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은 잘 안다.

큰 철제 헬멧을 쓰고 깊은 바닷속에 들어가 바다 밑 전복, 키조개, 홍합 등의 조개류를 채취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잠수기 어업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배나 배 위의 도구들이 동력화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술상의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배 위에서 펌프로 호스를 통해 산소를 공급하기에 바다 밑 잠수부는 오랫동안 잠수할 수 있다. 맨몸으로 잠수하는 해녀에 비해, 더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더 많이 채취할 수 있다.

반면 위험도 크다. 바닷속에 오래 머물기 때문에 잠수병이 생기기 쉽다. 공기호스가 절단되어 잠수복 내부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면 무거운 추와 헬멧을 장착한 잠수부는 혼자 힘으로 떠오를 수 없어서 결국 익사하고 만다. 공기펌프를 작동하거나 잠수부를 끌어올리는 선상 작업자는 잠수부의 목숨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이기에, 잠수부의 부모·자식·형제 등 가까운 사람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 잠수기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들여와 1870년대부터 어업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래 잠수기는 서유럽에서 개발해 대형 선박 밑바닥 수리, 침몰선 인양 등에 쓰던 기술이다. 서구에서 잠수기는 조개류 채취 같은 어업에 이용되지 않았다. 어업에 쓰이지 않던 서구 잠수기 기술이 일본에 들어와 변형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 변형은 동아시아의 소비문화와 관련된다. 한국·중국·일본의 전복 선호는 전 세계적으로 각별했다. 예를 들어, 오사카 남부 와카야마현의 다이지초 어민은 19세기 후반 캘리포니아 해안에 전복 등 해산물이 풍부한 것을 보고 집단 이주해 회사를 세운 다음 전복을 따서 일본에 수출했다. 당시 일본인의 이민을 경계한 미국은 일본 회사의 전복 수출을 금지한다. 그러자 캘리포니아 지역 레스토랑에 전복이 공급되었고, 미국인에게 익숙한 스테이크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전복 스테이크라니,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되지 않는다.

가파도에선 전복, 욕지도에선 홍합 채취

유럽에서 일본으로 도입된 잠수기는 지바현·시즈오카현·나가사키현 등 몇몇 지역으로 확산되어 전복·홍합·키조개 어업에 사용되었다. 잠수기 어업은 초기에 막대한 수익을 남겼다. 바다에 들어가 새끼 조개까지 남김없이 채취하기에 결국 자원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에 전통 어법을 하던 어민들이 어장 황폐화 등의 문제를 제기했고, 잠수기 어업자는 일본에서 강제 퇴출되고 말았다. 단단하고 두꺼운 철제 잠수 헬멧은 당시 어촌 주민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화 시대의 상징처럼 보였다.

일본 연안에서 퇴출된 업자들이 주목한 곳이 조선의 바다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주변국과의 갈등을 겪으며 연안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보다 개항이 늦어 해산물 상품화가 더뎠던 조선의 연안 어장은 일본인 업자가 ‘남획’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1883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을 통해 일본 어업 종사자는 조선의 전라·경상·강원·함경 4개 도 연해에서 합법적으로 조업할 수 있게 되었다.

초창기 일본인 어업자가 주목한 해산물은 전복·해삼·상어지느러미 등 중국 수출품이 많았다. 이 중 전복과 해삼은 잠수기 어업의 주요한 어획 대상이었다. 일본인 잠수기 어업자는 대한해협을 넘어와 무섭게 조업 범위를 확대해갔다. 나가사키현 출신 어민이 제주도 남서쪽 가파도를 거점으로 전복 잠수기 어업을, 경상남도 욕지도 근방에서는 도쿠시마현 출신 어민이 홍합 잠수기 어업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현지인의 생업과 충돌할 경우도 있었지만, 일본인의 세금 납부 의무를 규정한 ‘조일통어장정’의 시행 문제나 조선 내 반일 운동의 강화로 인해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는 큰 갈등이 벌어졌다. 이러한 갈등은 제주도·거문도·울릉도처럼 조선 왕조의 행정력이 약한 한반도 남부 외딴섬에서 많이 일어났다. 제주도에서 일본인 어업자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박찬식이 연구한 바 있다. 1884년 제주 서귀포·가파도·우도·비양도· 방두포·건입포 등지에 일본 어선 수십 척이 들어와 조업했는데, 이들은 연안 마을에 상륙해 주민 살상,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상품 밀매 등을 일삼았다. 제주도민이 병기를 들고 집단으로 맞서기도 했다.

제주 어장에서 조업하는 일본인 어선 수는 점점 늘어나 1898년에는 300~400척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잠수기선은 100여 척이었다. 1901년에는 일본인 445명이 막사 20여 개를 짓고 제주도 연안이나 주변 도서에 거주하면서 어업에 종사했다. 1894~1895년 청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인 잠수기 어업자도 조선 내에서 자신의 생업 범위를 확대해간 것이다.

조선에서 잠수기 어업이 확대되자 조선인 종사자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잠수기 어업을 하려면 배 위에서 2~4명이 펌프를 눌러 공기를 잠수부에게 공급해야 한다. 깊은 곳에 잠수하면 수압이 강해서 공기를 넣는 데 더 강한 힘이 필요해 인원수를 늘려야 했다. 일본 잠수부는 조선인 선원을 모집해, 잠수기선에서 펌프를 누르거나 노를 젓게 하거나, 해저에서 잡은 조개류를 끌어올리는 일을 맡겼다. 펌프를 눌러 공기를 공급하는 일은 잠수부의 생명과 직결된다. 잠수부와 선원의 관계는 일반적인 선장과 선원 간의 상명하복 주종 관계와는 다소 결을 달리했다.

ⓒ오창현 제공사가현 다라초에 있는 일본 잠수기 어업 발상지 선전물. 조선인 잠수부가 기술을 전파했다.

잠수기 어업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하고 가혹한 노동이었다. 또 체력 소모가 많아 젊은 잠수부가 아니면 계속할 수 없어서 세대교체도 빠른 편이다. 고용되고 몇 년간 현장을 경험하게 되면, 조선인 젊은이 중에 스스로 잠수기 어업에 나서는 이도 생겼다. 이 같은 사례는 이미 1910년대에도 발견된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는 함경남도의 조선제1구잠수기어업주식회사가 잠수부 양성소를 설립해 조선인 잠수부를 양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활동은 어업뿐 아니라 항만이나 가교 공사 등 잠수 공사가 필요한 곳으로 확대되어갔다.

여기까지는 유럽의 기술이 일본을 경유해 조선으로 들어온 일제강점기 어업 기술 전파의 매우 전형적인 사례이다. 물론 유럽에서 일본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기술은 분명히 문화에 적응해 변형되는 과정을 거쳤다. 흥미로운 것은 얼마 전 필자가 알게 된 규슈 사가현 다라초(太良町)의 잠수기 어업 사례이다. 이 지역의 관광용 지도를 보면, 다라초가 일본 잠수기 어업의 발상지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곳에 잠수기 기술이 조선으로부터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30년대 당시 사가현 다라초 어민은 직접 키조개 조업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업 시기에 맞춰 들어온 외지 잠수부들이 이곳 주민에게 어장의 권리를 구매해 조업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잠수부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전남 출신 조선인 잠수부가 많았다. 현지 어민들은 조선인 잠수부의 기술을 모방해 익히려고 시도했지만, 조선인 잠수부가 현지 어민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 같다. 기술을 알려주면 조선 잠수부가 돈을 벌 기회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지 어민들은 어깨너머 모방을 거쳐 잠수기 기술을 익히는 데 성공했고, 조선인 잠수부는 더 이상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겨우 몇몇 이주자만 남았을 뿐이다. 다라초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은 잠수부를 배출하고 있으며, 이들은 갯벌이 넓게 발달한 얕은 바다인 아리아케해 연안의 키조개 어업뿐만 아니라 잠수 공사 등에서 활약 중이다.

한반도 남해안의 ‘권현망’ 어법과 일본

유럽에서 개발되었고 일본의 일부 지역에 도입되어 개량된 잠수기 어업 기술이 조선으로 전파되었다가,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잠수기 기술이 없는 일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과 조선이, 어장이 통합되고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시대였기에 가능했다. 어구뿐 아니라 숙련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잠수기 어업의 경우 자연환경의 유사성이 기술 전파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었다. 지구화 시대인 지금 수많은 기술이 지리적 근접성을 불문하고 자본과 기술이 투자되는 곳이면 어디든, 또 다른 나라 제품을 수입해 조립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 곳곳에 전파된다.

기술은 전파되지만,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술이 떠나온 ‘고향’을 잊지 않는다. 한국 어민 역시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이 일본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반세기가 흘러 전혀 다른 기술을 사용하지만, 기술에는 여전히 고향이 남아 있다. 남해안에 가면 ‘권현망’이라고 부르는 멸치 어법(漁法, 고기 잡는 방법)이 있다. 현재 사용되는 어법은 여러 번 개량을 거쳐 20세기 초 일본에서 들어온 권현망과 완전히 다르게 변했다. 남해안 어민들은 이 어법을 ‘권현망’이라 부르며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 기술이 변용되어 완전히 새롭게 정착하더라도 그 기술의 고향은 잊지 않은 것이다.

사실 잠수기 기술도 저 멀리 유럽에서 시작되어 일본, 조선, 다시 일본으로 이주해왔다. 아마 유럽에서 이 기술의 고향은 또 다를지 모른다. 기술에도 인간과 같은 고향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은 흔히 회자되는 “독일 차는 어떻다” 혹은 “일본 차는 어떻다” 하는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나 기술 자체에 대한 객관적 분석 결과를 나타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기술의 전파 이면에 실재하는 인간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어떤 기술 전파도 전달하고 수용하는 ‘인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기술 전파가 인간관계 밖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최근의 기술 연구가 주목하지 않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 10월2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막한 한·일 공동기획전 〈미역과 콘부〉(2020년 2월2일까지)를 함께 기획한 이소모토 히로노리(도쿠시마 현립박물관)의 도움을 받았다.

※ 이번 호로 ‘바다의 현대사’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하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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