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들 출판사가 펴낸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디 아메리칸스〉.

가끔은 ‘아메리카’ 그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 ‘본 인 더 유에스에이’는 레이건 시대 위대한 미국 칭송으로 오해된다. 사실은 미국 노동자 계급의 고달픈 삶을 노래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진집 〈디 아메리칸스〉의 로버트 프랭크가 지난 9월9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브레턴섬의 작은 병원에서 아흔넷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디 아메리칸스〉도 제목 탓인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직후 번영을 구가하던 미국인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대로 포착해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라고 곡해되기도 한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스물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로버트 프랭크는 1959년 미국을 횡단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기록한 사진 83장이 담긴 〈디 아메리칸스〉로 사진사를 새롭게 썼다. 당시만 해도 미국 사진은 선명하고 밝으며 고전적인 양식이 일반적이었다. 프랭크의 사진은 노출이 엉망이어서 진흙탕 같았고 술 취한 듯 삐딱하고 흔들리는 프레임이었다. 게다가 사진집에 담긴 유색인종, 성소수자들, 거만한 백인들과 차별의 흔적은 당연히 “자신을 입양한 나라를 싫어하는 재미없는 남자”라고 평가받을 만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스위스 출신이기에 유럽의 관점으로 미국을 담으려 했다는 것도 오해다. 그는 미국으로 오기 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포토저널리즘에 경도된 그와 결별한다. 미국 사진가 워커 에번스와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미국 풍경이 담긴 예술성에 심취했다. 프랭크가 주관적이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담아낸 사진은 〈뉴요커〉 비평가 재닛 말콤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사진의 대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투쟁하는 이들에게 늘 동정을 표한 사진가

〈디 아메리칸스〉는 원래 프랑스의 델피르 출판사가 펴낸 미국 총서 중 한 권의 삽화로 선보였다. 글로브 출판사의 미국 초판에는 〈온 더 로드〉로 유명한 시인 잭 케루악이 서문을 쓰며 화제가 된다. 케루악은 “장송곡이 흘러나오는 듯한 주크박스의 사진”에 매료됐다.

하지만 프랭크는 곧 사진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뉴욕에서 일어난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영화 운동에 빠져든다. 1965년 프랭크는 그의 첫 장편영화 〈나와 내 형제들〉을 발표했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가정사는 순탄치 않았다. 1969년 아내와 이혼했고 1974년 딸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이듬해인 1975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촌마을에 은둔했다. 이후 그는 동네에서 주민들을 찍고, 사적이며 내면적인 풍경의 대형 폴라로이드 작업을 했다. 대외 활동은 피했다. 그사이 〈디 아메리칸스〉 사진은 전설이 되어 세계를 돌며 순회전을 했다.

오래전 프랭크는 영국 〈더타임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어머니는 내게 ‘왜 항상 가난한 사람들 사진을 찍니?’라고 물으셨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늘 동정을 표했다. 그리고 (사회적) 규칙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불신도 있었다.” 이것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진가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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