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한영용 우키시마호 희생자유족회장(사진)은 “용산 미군 기지에 일제 피해자 추모공원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께,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 항구 300여m 지점에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수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틀 전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이 배는 해방 후 첫 귀국선이었다. 승선자 대부분은 오미나토 해군 시설부 군무원 또는 노무자 신분으로 비행장과 철도공사장, 하역 작업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

“육지가 보인다.” 경남 거창의 한 동네에서 나란히 일제에 징용당했다가 이 배를 탄 유경수씨(당시 28세)가 갑판에 먼저 나와서 아래 선실에 있던 후배 한석희씨(당시 26세)를 향해 소리쳤다. 한씨는 사각 트렁크 가방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갔다. 가방 안에는 아들 영용이와 부모를 위해 마련한 귀국 선물이 들어 있었다.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리면서 한씨의 몸이 허공에 솟구쳤다. 그가 붙잡고 있던 트렁크 가방이 바다로 튕겨나갔다. 물로 뛰어든 한씨는 필사적으로 트렁크를 붙잡았다. 그 순간 “쾅, 쾅!” 두 번의 폭발음이 더 울리며 길이 100m에 이르는 우키시마호 갑판 한가운데가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갈라진 부분이 물에 잠기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바다로 떨어졌다.

유씨는 한씨에게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매달려 있다가 맨 윗사람 손에 힘이 빠지면서 하나씩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배를 포기한 유씨는 눈물을 삼키며 기울어진 갑판을 기어올랐다. 삽시간에 배는 비명과 통곡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유씨는 근처에서 구조하러 나온 어선에 발견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시모노세키로 이동해 한 달 뒤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는 거창의 한씨 집을 찾아가 죽음을 알렸다. 한씨 아버지는 외아들 한석희씨 빈소를 차렸다. 빈소에는 세 살 난 아들 영용이 뛰어다녔다.

그 세 살배기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상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1972년부터 줄곧 우키시마호 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한영용씨는 “정부가 우키시마호 생존자와 유가족이 모두 자연사하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나서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 9월19일 개봉했다.

“조선인 8000명 승선, 6500명 사망·실종”

올해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가 9월19일 개봉했다. 한영용 회장도 출연했다. 영화는 바다를 배경으로 수많은 곡소리가 들리는 장면으로 시작해 같은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몇 사람 남지 않은 생존자와 유가족이 등장한다.

우키시마호에는 몇 명이 탔고, 왜 침몰했을까? 또 한·일 양국 정부는 왜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영화에 등장하는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은 귀국이 전쟁 증거 인멸을 위한 일본의 작전이라고 증언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대본영은 시모키타반도 일대와 가마부세산을 요새화했다. 가바야마 비행장, 미사와 비행장, 오마 철도, 오미나토 항만 등 공사와 군수물자 상하역과 운송 등 전쟁 시설 구축에 조선인 9000명을 투입했다. 대부분 1945년 8월 초까지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무자들이었다.

피해자들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비밀 군사기지 건설 작업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풀 리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다른 귀국선은 일본이 항복한 지 한 달 이상이 지난 9월16일 이후, 부산과 가까운 시모노세키 등에서 출항했다.

사망자 축소 조작도 의혹 중 하나다. 일본은 1945년 9월1일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조선인은 3754명이고,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조선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했다. 피해자들은 조선인 승선자 수도 줄잡아 7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 사망자 수는 줄잡아 2000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또 일본은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생존자와 유족, 그리고 인근 사고 현장 목격자들은 기뢰가 아닌 내부 폭발이라고 주장했다. 우키시마호에서 일본 해군으로 근무한 일본인은 기관실 옆 창고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영용 회장은 1991년 우키시마호 피해 유족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냈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 측 자료가 많이 공개됐다. 한 회장은 재판 과정에서 입수한 자료와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침몰 원인을 이렇게 추정했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으로 항진해 들어갈 때 이미 기뢰 소해 완료라는 신호를 받고 입항했다. 배에는 부산으로 가는 해도도 없었고 충분한 연료조차 싣지 않았다. 배는 부산으로 향하는 항로 대신 일본 열도 연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해상에서 멈춰 섰다. 배가 멈춘 뒤에 일본 해군 승무원 250명은 구명보트를 내려서 탈출했다. 해군 승무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에 폭발음이 났고 배는 가운데부터 꺾이면서 침몰했다. 인근 어촌 마을에서 어부들이 거룻배를 몰고 나와 인명 구조에 나섰다. 살아난 사람들은 마이즈루 근처 다이라 해병단에 임시 수용되었다. 그날 밤 임시수용소 2층에서 또 한 번의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생존자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마이즈루 바닷가로 가족을 찾아 나섰으나 시신이 기름범벅이 되어 형체를 식별하지 못했다. 이때 일본 해군이 시신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바닷가에 묶은 다음 기름을 붓고 태워 산골짜기에 매립했다. 이 같은 비극적 대참사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

한영용 회장은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의심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침몰한 배를 즉시 인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배가 두 동강 난 채 중앙 부분이 수심 17m에 가라앉은 우키시마호의 선미와 선수는 이후 9년 동안 흉물스러운 풍경으로 바다 위에 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가라앉은 배 중앙 부분에 죽은 사람이 몇 명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인양조사도 하지 않고 조선인 사망자 수를 524명이라고 발표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통제했다. 사건 발생 40여 일이 지난 1945년 10월8일 〈아사히 신문〉이 침몰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비보를 접한 ‘재일조선인연맹’은 뒤늦게나마 행동에 나섰다. 자체 조사를 통해 우키시마호 승선자는 8000명, 사망·실종자가 6500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토대로 1945년 12월7일 우키시마호가 출항한 아오모리현 조선인연맹 손일 위원장이 연합군총사령부(GHQ) 법무부 검찰과에 진상조사·책임 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을 냈다. GHQ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했다.

우키시마호 인양은 1950년,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조일우호협회가 나서 일본 정부에 ‘유골을 원형 그대로 보존 회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양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이 요구를 묵살하고 고철을 재활용하겠다며 다이너마이트로 선체를 폭파한 뒤 인양했다. 일본 정부는 그 과정에서 인양된 유골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화장해버렸다. 애초 발표한 사망자 숫자에도 변동이 없었다.

한영용 회장을 포함한 피해자들은 그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왔다. 1991년 한 회장의 소송에 이어, 이듬해 전남 광주 지역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70여 명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을 청구했다. 2001년 교토 지방법원은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인정해 사망자 유가족 1인당 각각 300만 엔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003년 오사카 고등법원 재판에서는 1심 판결이 뒤집혀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우키시마호로 한국인을 수송한 것은 치안상의 이유에 의한 군사적 조치이기에 안전 운송 의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일본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확정됐다.

우키시마호의 선미와 선수는 9년 동안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위는 영화의 한 장면.

일본 정부 초기 발표 신뢰할 수 없어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피해자들에게 깊은 한을 남겼다. 박정희 정권은 우키시마호 침몰이 해방 후 사건이라며 피해자 범위에 포함하지 않았다. 이후 노무현 정부 들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이 일부 이뤄졌다. 2008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는 우키시마호 사건을 조사해 자료집 2권을 펴냈다. 진상규명위는 실제 사망자 수와 관련된 승선자 규모, 폭발 원인 등 일본 정부 초기 발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이 사고 당시 구체적인 실태조사를 벌이지 않았고, 관련 문헌 자료도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일본 정부가 역사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편승자 명부, 유골 수용 명부, 항해일지 등 문헌자료를 제시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협조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진상규명위는 밝혔다.

한영용 회장은 2012년 5월 사건 현장인 마이즈루만을 찾기도 했다. “교토 항만청에 수중 수색을 신청해 허락을 받아 사비로 일본 잠수 전문가들을 고용해 선체 중심부가 가라앉았던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 부분에 뻘이 3m 정도 쌓여 있었다. 수중 탐사 전문가들은 뻘만 제거하면 유품이나 유골이 화석 모양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이 수색 활동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와 국회, 외교부 등에 보냈다. 하나같이 “주일 한국 대사를 통해 알아보고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한 회장은 또 일본 교토현 지방정부에도 탄원서를 냈다. 우키시마호 침몰 현장 부근에 세워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문구에 ‘침몰 순직자’로 쓴 것은 부당하니 ‘침몰 희생자’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순직자란 일본을 위해 일하다 사망한 자국민에게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교토현은 “민간인 모금을 통해 들어선 위령비라 모금 참가자 개개인의 의사를 물어봐야 해서 변경하기 곤란하다”라고 답변했다.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그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지칠 줄 몰랐다. 한 회장은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회장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하소연했다. 민화협은 일본 유텐사라는 절에 안치된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280여 위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는 데 성공했다. 안치할 곳이 문제였다. 제주도에 있는 한 사찰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피해자가 100만명이 넘는데 아직도 변변한 추모공원 하나 없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한영용 회장은 일제강점기 피해자 추모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산 미군기지가 반환되면 그곳에 추모공원이 들어서야 역사와 미래에 부합한다고 본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가 그 싹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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