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지난 몇 년 동안,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김초엽을 기다려왔던 것만 같다.’ 김초엽 작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다. 지난봄, 김원영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기다려왔다.” 단행본이 출간되기 전이었고 의미는 좀 달랐다. 김원영 작가는 지체장애인, 법률가, 공연예술가, 남성이다. 김초엽 작가는 청각장애인, 공학 전공자, 소설가, 여성이다. 두 사람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올해 초, 김원영 작가에게 연재를 제안하면서였다. 두 사람은 각각이 겪은 장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논쟁을 탐구하기로 한 상태였다. ‘김초엽·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이하 ‘사이보그가 되다’) 연재가 시작됐다. 복잡한 논의도 쉽게 읽혔는데 당사자들은 매번 새로 공부하는 게 힘들었다고 뒤늦게 토로했다. 그사이 김원영 작가는 서울변방연극제에서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무대에 올랐고, 자신이 등장한 EBS 〈다큐 프라임-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차마 보지 못했다. 요즘은 10월에 있을 공연을 준비 중이다. 김초엽 작가는 6월 책을 낸 뒤 북토크 등으로 바빴다. 두 사람을 〈시사IN〉 편집국에서 만났다. 〈시사IN〉에 연재된 글을 다시 읽고 이번 대화를 정리하면서 어쩌면 우리 사회가 두 사람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려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IN〉에 ‘사이보그가 되다’를 4개월 연재하는 동안, 각각 연극 무대에 섰고 첫 소설집을 냈다.

김원영:이번 공연은 도전의 측면이 컸다. 나로선 자연스럽고 많이 하는 움직임이지만 공적으로는 보여주지 못했던 걸 공연의 요소로 삼았다. 대놓고 내보이지 않았던 문제의식도 담았다.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매일 다른데 자다가 이불킥 하기도 한다(웃음). 한편으로는 이슬아 작가처럼 공연을 좋게 봐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저 ‘장애인이 공연하네’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게 좋은 경험이었다.

김초엽:첫 단행본이 5쇄를 찍었다. 소소하게 꾸준히 읽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초기 반응이 좋아서 기쁘면서도 당황스럽다. 책 나온 뒤 반응을 보는 게 재밌었다. 소설의 전체 주제와 ‘사이보그가 되다’ 주제가 비슷하다. 기술과 인간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평소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소설집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감이 잡히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언제인가?

김원영:지인이 김초엽 작가의 페이스북 글을 공유해 포항공대 당시의 경험을 접했다. 이후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한 〈관내분실〉을 읽었고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작년 여름 북콘서트에 김초엽 작가가 와서 질문을 했다. 그때 알아보고 물었다. “〈관내분실〉 낸 분이죠?” 이후 작가의 SF 강의를 들었다. 두 번째 봤을 때 운을 띄웠다. 제안하고 싶은 작업이 있으니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김초엽:알아봐서 당황했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책에서 다양한 장애 유형을 다루는데 장애 당사자라고 해서 다른 장애의 경험을 아는 게 아닌데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했다. 당사자인 친구들에게 많이 물어본다고 답했던 게 기억난다.

장애와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로 한 계기가 있다면?

ⓒ한성원 그림

김원영:학부 때부터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논의에 관심이 있었다. 황우석 사건 때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강연하는 무대에 척수장애인을 데려와 본인의 과학기술을 얘기하는데 마치 교주 같았다. 그때 장면이 충격적이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갖는 힘이 있는데 장애와 결합되자 종교처럼 되었다. 문제의식이 있었지만 로스쿨 가면서 한동안 거리를 두다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쓰며 생명윤리 이슈를 다뤘다. 그러던 차에 4차 산업혁명 얘기가 나왔고 거기에도 장애인 이야기가 나왔다. 아, 이 논의에 한번 개입할 필요가 있구나 생각했다. 학문적 논의를 하자는 건 아니고 담론 영역에서 장애인이 배제되어 적어도 누군가 얘기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혼자 하기엔 한계가 있고 김초엽 작가가 적절한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성별도 다르고 장애 유형도 다르고 분야의 차이도 있었다.

김초엽:학부 때 과학기술학에 관심이 많아 스터디를 했다. 그때 인종과 젠더 문제는 다뤄도 장애는 다루지 않았다. 작가 활동을 하면서 장애를 드러내야 할 때가 많았다.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며 과학과 기술이 장애에 개입할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는데 연구나 문제 제기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사이보그가 되다’ 연재를 하며 공부를 많이 했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주제이고 국내에선 참고할 자료가 거의 없었다. 황우석 사건을 말하자면 생명공학 외에도 기술과학을 말할 때 장애인을 홍보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가 처음으로 소리를 듣는 순간, 장애인이 로봇에 의지해서 걷는 순간 같은 걸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며칠 전 (과학기술과 미래사회를 주제로 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를 읽었는데 황우석 사건 얘기가 나온다. 예전엔 과학이 현상을 분석하고 가설을 수립해 자연을 분석하는 일이었다면, 갈수록 대중의 기대와 낙관에 호소하는 학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연구비가 많이 들다 보니 ‘무엇을 밝히고 분석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낙관을 약속하는 학문이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장애가 기술 발전을 홍보하는 아이콘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인식을 대중한테 심어줄 수 있다.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허용치도 늘어날 거다.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면서 어떤 고민이 있었나?

김원영:이런 글을 쓸 때 항상 고민스러운 게 장애인 인권운동 진영에서 보면 당면한 이슈는 아니라는 점이다. 65세 이상 장애인의 활동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게 실제로 중요한 이슈다. 그렇다고 학자를 대상으로 한 글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철저하지 않은 글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거나 관심 가질 만한 사람들이 의식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관련 논의가 나올 때 ‘장애인 당사자들이 뭔가 문제 제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감각을 갖게 되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과학이라는 틀 안에서 장애라고 하는 인간의 경험과 존재방식을 느끼게 하는 데 더 방점을 두었다. 경험을 부각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각각 처음 보청기를 낀 날, 처음 휠체어에 오른 날로 ‘사이보그가 되다’를 시작했다. 장애가 치료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속성의 일부라는 시각이 바탕에 있다. 그걸 자각하는 과정이 두 사람에게도 있을 것 같은데.

김원영:적어도 2000년대부터는 그런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과학기술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견해도 있었던 것 같다. 과학 혁신이 일어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기술과 결합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치료와 개선이라는 테크놀로지의 이상적 관념을 어떻게 경계할 수 있을지 그 틈새를 이야기하는 게 어려웠다. 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여러 경험이 있다. 그걸 이야기할 기회도 많았다. 이번엔 차별의 경험보다 신체의 결핍을 보완하는 어떤 것과의 만남에 집중했다.

ⓒ허블-제공

김초엽:장애가 후천적이기도 하고 청각장애는 숨기는 게 유리하기도 해서 회상할 만한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살았다. 내가 잘하면 돼, 내 능력이 뛰어나면 돼. 오랫동안 그런 생각으로 살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늦게 알았다. 알고 나니 편해졌다. 능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사실은 사회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내 개인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혼자 뚫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연대해서 뚫고 갈 수도 있는 거구나 인식한 순간이 왔다.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편이라 예전 같으면 기술로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을 것 같다. 그게 완벽하지도 않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과학기술을 낙관하기보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에 대해 말하는 게 맞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서로의 글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김원영:경험의 차이가 있는데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결론이 매우 흡사해 한편으로는 신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우리가 맞이할 시대의 흐름인가 싶었다(웃음). 가시적 장애(지체장애)와 비가시적 장애(청각장애)가 달랐다. 내 글은 신체의 문제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김초엽 작가는 장애를 고민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는데, 논의를 금세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게 놀라웠다.

김초엽:장애와 관련된 글을 본격적으로 쓰는 게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의견이 일치하는 게 놀라웠지만 차이도 느꼈다. 장애 유형의 차이도 있지만 젠더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최근 페미니즘에서 탈코르셋 담론이 진행 중인데, 여성의 몸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고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몸을 보지 말라는 시각이다. (장애인의 몸도 아름다울 수 있는가에 대해 얘기한 김원영 작가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었고 ‘돌봄 로봇’ 얘기를 읽으면서도 젠더 관점에서 보게 됐다.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노동인데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 낸 건 아닌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한성원 그림

김원영: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다. 아름다움은 큰 개념이다.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말한 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모습을 불편하지 않게 느낄 수 있을까, 장애 있는 사람의 신체에도 그런 게 가능한가 이런 고민이다. 그러다 보면 이게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콤플렉스일 뿐인가? 하는 생각도 솔직히 한다. 둘 사이 어떤 경계가 있는지 아직 고민되는 지점이다. 돌봄은 처음 생각하게 된 건데, 글에는 돌봄 행위를 주변의 여러 존재자들이 나눠서 진다는 전제가 있었다. 특정 동물이나 성별, 특정 기술이 전담하는 게 아니고 여러 존재자들이 돌봄의 기능을 나눠서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오히려 그걸 로봇이라는 특정 기기에 전담시킬 때 많은 관계들이 다 절연되는 거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김초엽:언젠가는 아름다움 자체의 위계를 없애는 쪽으로 가는 게 맞지만 장애인의 몸은 아름다움을 얘기할 만큼도 도달 못했다. 전략적으로 과도기를 거쳐서 가자는 거면 생각해볼 수 있다. 장애인의 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화두를 꺼내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어딘지 고민이 필요한 듯하다.

김원영:내가 가진 문제의식은 장애인이 기술을 통해 기능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지만 위계나 차별을 없앨 순 없다는 점이다. 기술이 발전해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도 분명히 장애를 가진 사람은 여전히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을 수 있다. 기능적 문제를 해결했는데 왜 그런가. 오히려 그때 미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가 작동하는 게 아닐까. 그걸 돌파하지 않고선 과연 기능의 개선이 모든 장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기능적 제약을 벗어나더라도 위계를 없애기 어렵다는 데 동의하나?

김초엽:동의하지만 기술이 미를 안 놓치고 가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의족을 만들 때도 사람의 다리랑 같다는 걸 강조한다. 사용자가 미적인 요소를 굉장히 신경 쓰기 때문이다. 기술 자체가 장애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측면이 있어서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고 같이 가는 것 같다. 기능적 문제만 생각하면 오히려 문제 해결은 쉽다. 미적인 요소에 신경 쓰기 때문에 장애인들의 선택지가 오히려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다.

김원영:보청기를 예로 들면 그걸 안 보이게 하려는 노력 때문에 기능적 측면이 더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런 점이 재밌는 차이다. 기능적인 개선이 사람의 차별을 없애는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의족을 다리와 똑같이 만든다고 하는데 중요한 건 의족을 어느 순간 벗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름답게 디자인된 휠체어를 타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나 자체를 그렇게 보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추구할 것은 정상으로 보이는 좋은 보조기가 아니라, 보조기를 벗어도 ‘비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데 있지 않을까?

정상성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어떤 사이보그가 되어야 할까?

김초엽:장애학이 기술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술이 반드시 일부 자본과 권력에 의해 점령되는 게 아니라 대중이 참여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장애와 기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다만 기술이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과 낙관을 주는 게 나쁘다. 그로 인해 현재의 문제 해결을 유보하는 측면이 생긴다. 어차피 장애는 치료가 되니까 사회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거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기술 발전에 떠넘기는 게 아닌가. 한편으로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는 없다. 인공와우가 대표적이다. 기술과 장애를 다루는 논문 중 상당수가 인공와우 얘기다. 듣게 하는 기술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재활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만 봐도 장애를 해결하는 기술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기술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혜택을 받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김원영:계속 몸의 위계를 지우는 일이 벌어질 거다. 기계랑 결합한 인간보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고, 얼마나 좋은 기계인가에 따라 나뉠 수도 있다. 인간은 신체에 가치 매기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장애 운동은 그에 대한 싸움이다. 1차적으로는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사람의 생존이나 권리 획득을 위한 거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인간의 몸에 부여된 위계에 맞서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기능적·미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았던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가 나의 일부이고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근 몇십 년간 서구와 한국 사회에서 이런 전제가 있었다. 이 태도가 중요하다. 성형수술이든 의료 기술이든 인간을 개선시키려는 시도 안에서 이런 태도는 많은 걸 성찰할 수 있게 한다.

두 사람의 장애를 치료하는 과학기술이 나오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김초엽:실제 난청 치료제는 활발하게 개발 중이다. 신경세포를 살릴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 굳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할 것 같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홍보부터 하며 호도하기도 한다. 일희일비하는 태도가 장애인의 삶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도 일상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박동명-제공

김원영:있다면 당연히 취할 것 같지만 굉장히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 잃는 것 없이 완벽한 건 없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의 지출이 있을 거다. 기능을 고치기 위해 다른 것을 상실해야 한다면 쉽게 결정하진 않을 듯하다. 엄청난 돈일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다른 장기나 골격계에 부담이 갈 수도 있고, 그렇게 됨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캐릭터를 가진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김초엽 작가에게 묻고 싶다. 글에서 우리가 이미 사이보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시점, 왜 장애인을 사이보그적인 존재라고 규정하려 했는가? (김원영)

김초엽:글에서 쓴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사이보그적 속성이 있다. 장애인은 기술을 이용해 자기 삶을 변형한다는 측면에서 사이보그의 최전선에 있다. 몸에 개입한 기술에 대해 좀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기술 발달은 보통 사람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불편을 못 느낀다. 스마트폰도 젊은 사람들 위주로 발달해서 나이 든 분들이 어려워한다. 몸이 기술에서 소외되는 이슈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장애인 사이보그의 이야기가 가장 최전선에 있지 않을까. 여기서 시작해 기술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논의를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원영:공감한다. 다만 사이보그적 인간으로 장애인을 말한 맥락은 조금 다른 듯하다. 사이보그는 주변의 외적인 것들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유기체다. 장애인과 보조기, 장애인과 활동지원인의 관계, 발달장애인과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런 게 주는 함의에 집중했고 강조한 부분이 조금 다른 것 같다.

트랜스휴머니즘이나 돌봄 테크놀로지 개념 자체도 낯선데 한 발짝 더 나아간 논의를 한다.

김초엽:독자들이 트랜스휴머니즘이 뭔지 모르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쓰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속성으로 접하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장애 기술에 대한 기존 논의가 있고 비록 이것이 가시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거기에서 더 나아간 지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환기시킨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몇 년 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논의가 활성화되면 비판받을 만한 글이 되겠지만 오히려 낡은 이야기가 될수록 좋을 것 같다.

김원영:전문가의 코멘트가 없어서 아쉬웠다. 장애인들이 장애 얘기를 하니까 개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이 안 되거나 이미 우리가 한 논의에 대한 반론이 해외 연구에 있을 수 있다. 피드백이 왔으면 좋겠다.  

두 사람의 장애가 각각 SF 작가, 연구자·법률가·공연예술가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김초엽:글 쓰며 공부한 걸 소설에 많이 적용했다. 사이보그에 대한 소설도 썼다. 내 소설에는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데 인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큰 도움이 됐다.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되었다. 글은 내년 중에 더 나올 것 같다. 레퍼런스를 보강하고 해외 논의를 더 찾아볼 예정이다.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는지에 따라서도 내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둘의 관점 차이에 집중하면 다양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김원영:장르에 투신한다기보다 하나의 문제의식을 여러 매체로 담고 있는 거다. 글을 쓰고 몸을 움직여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데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표현해낼 수 있는 게 좋다. 12월에는 연재했던 것과 같은 주제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