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 동이 반으로 뚝 끊겨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출입구도 따로, 엘리베이터도 따로이고, 계단은 십몇 층에서 막혀 있다. 계단이 그대로 천장과 맞닿아 끊어져 있는 모습에 숨이 턱 막힌다. 분양 층인 고층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올 수 있지만, 임대 층인 저층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구조. 불이 나서 옥상으로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냐고 기자는 묻는다. 그 아찔한 현장에 이 그림책이 겹친다.
봉제공장, 인형공장, 단추공장이 모여 있는 서울 독산동.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은이가 산다. 할머니들이 잘못 만든 인형은 아이들 차지가 되고, 눈이 없어도 대신 갖다 붙일 불량 단추는 얼마든지 있는 동네. 엄마 아빠들은 일하다 집으로 와서 아이들 점심 먹이고, 놀다 다치면 닦아주고, 아이스크림 사서 나눠 먹어라, 용돈을 건네기도 하는 독산동. 받아쓰기에서 ㅁ과 ㅂ을 자꾸 헛갈리는 것만이 고민인 독산동 은이의 세계가, 어느 날 쩌억 금이 간다.
시험에 ‘이웃에 공장이 많으면 생활하기 어떨까?’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매우 편리하다’는 은이의 답이 틀린 것이다. 선생님이 정답을 알려준다. ‘시끄러워 살기가 나쁘다.’ 선생님은 “이 동네처럼”까지 덧붙인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는 것이다. 주먹 꼭 쥐고, 입 꼭 다물고, 눈살 잔뜩 찌푸린 채 은이는 ‘이 동네’에 있는 집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걷는다. 팔 휘두르는 소리가 휙휙, 발 구르는 소리가 쿵쿵 들리는 듯하다. “처음 알았다, 우리 동네가 시끄러워 살기 나쁘다는 걸. 선생님이 가르쳐주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나쁜 동네에 산다는 걸.” 은이의 혼잣말이 깊고도 날카롭게 가슴에 박힌다. 이 아이의 가슴은 얼마나 헤집어졌겠는가.
이런 교과서, 이런 선생님이, 오르는 계단을 막아버린 천장처럼 은이의
숨통을 조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아니었다면. 받아쓰기를 틀려도, “틀려도 괜찮다. 왜 틀렸는지만 안다면”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빠는 “넌 교과서가 틀린 것 같니?” 질문만 던진다. “응.” 은이의 대답에, (이 장면의 글은 거기서 끝나지만) 아빠는 싱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것 같다. 엄마는 “넌 선생님이 모르는 것 같니?” 질문을 던지고, “선생님은 딴 동네 사니까 이 동네를 모를 것이다”라는 대답을 끌어낸다. 엄마는 “우리 동네는 우리 은이가 잘 알지”라며 아이를 북돋아준다.
이렇게 숨통을 틔워준 부모 덕분에 아이는 그 시험지를 수십 년 간직했다가 넉넉한 눈으로 뒤돌아보며 이렇게 정갈한 글로 품위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밀도 높은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시대를 재현해낸 그림은, 모두 힘을 합쳐 아이들을 키워내는 한 동네의 온기와 생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책을 보고 누군가는 좀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그 아파트 계단을 막은 천장은 슬그머니 뚫어주면 좋겠고, 그 교과서는 이 책에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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