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는 자신이 묻힐 묏자리를 찾아다니다가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근처에서 마땅한 자리를 점찍었어. 궁궐로 돌아오는 길 고갯마루에서 이성계는 “이제야 근심을 잊겠구나”라며 기뻐했다고 해. 그래서 나온 지명이 망우리(忘憂里). 즉, 걱정을 잊은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어. 1933년 일제는 이 망우리에 대규모 공동묘지를 조성했고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데 수만명이 묻힌 이곳에 한 일본인의 묘가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단다. 아사카와 다쿠미라는 사람이야.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한 소개는 그의 묘비명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에서 농림학교를 나와 영림서, 우리 식으로 하면 산림청에 근무하던 도중 조선에서 교사를 하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권유로 조선 땅을 밟게 돼. 형 노리타카는 조선 도자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연구자였고 후일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사람이야. 다쿠미 역시 조선을 좋아했고 조선을 지배하는 일본의 횡포에 분노했어.

ⓒ수림문화재단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공예품에 조예가 깊었다.


“조금 내려가면 조선신사 공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파괴하고, 장려한 문을 떼어내가면서까지 굳이 숭경을 강제하는 신사 따위를 거액의 돈을 들여 지으려는 관리들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 없다. 산 정상에서 경복궁 안의 신축청사(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내려다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1922년 6월4일 일기 중).”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 공무원이었다. 그의 눈에 조선은 온통 시뻘건 민둥산 천지였어. 그나마 남은 산림은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의 손에 넘어갔고 거기서 혹여 도토리라도 줍다가 발각된 조선인들은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했어. 이를 본 아사카와 다쿠미는 이렇게 한탄했단다. “도벌, 채취자의 형벌이 엄할지라도 산은 푸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 산림을 가꾸기는커녕 그나마 남아 있던 조선의 산림을 깡그리 수탈하려 드는 일본의 행태에 반발한 그는 조선 사람 위에 군림하려 들던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조선인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어. 조선어를 배웠고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일본 경찰이나 관리들에게 조선인으로 몰려 봉변을 당할 만큼 조선인 직원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전국의 산과 숲을 누볐다고 해. 수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자연 상태에서 조선오엽송(잣나무) 종자를 발아시키는 ‘노천매장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냈어. 덕분에 2년이 걸리던 잣나무의 양묘 기간이 1년으로 단축됐지.

아사카와 다쿠미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목원이며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국립수목원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기도 해. “1922년 임업시험장이 창설되면서 광릉 국유림에 각종 시험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사용승인 신청을 계속했고 이것이 발판이 되어 1929년 6월5일 광릉출장소가 설립(국립산림과학원, 〈과학이 그린〉)”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니까. 아사카와 다쿠미는 그곳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어떻게 숲을 조성할지 일일이 고르고 다듬었단다.

“일본의 행위가 이 아름다운, 천사 같은 사람들의 행복을 어딘가에서 방해하고 있다면, 하느님 부디 용서해주십시오(1922년 1월28일 일기 중)”라고 기도했던 그는 조선을 무한히 애정하는 마음으로 일본인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죄스러움을 떨쳐버리려는 듯했어. 조선 도자기에 빠졌던 형 노리타카처럼, 그도 조선의 공예품에 열광했단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조선의 소반이었어. 소반이란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밥도 먹고 술상도 차렸던 앉은뱅이 상을 말해.

조선 소반의 아름다움에 매료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조선 사람 중에서도 하루 세 끼 밥상으로 쓰던 소반에서 그리 웅숭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은 드물었을 거야. ‘사용자가 사용하면서 세월의 때가 묻게 되면 더불어 예술성도 얹힌다는 개념(김병종, 〈화첩기행 3〉)’을 제시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왜 조선의 소반에 주목했을까? 그건 소반이란 것이 온돌방에서 생활하는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지. 이쯤 되면 그가 일본인으로 잘못 태어난 조선 사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

 

ⓒ연합뉴스4월2일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내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에서 88주기 추모식을 열고 있다.

 


그토록 조선의 이모저모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을 푸르게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는 데 소홀함이 없었어. “민둥산의 특징은 잔디가 없고 항상 벌거벗고 있다. 표토가 안정되지 않아 붕괴되기 쉽다. 땅이 얕아서 적당한 습기가 있다. (…) 그렇다면 싸리나무나 오리나무 종류를 파종하여 조림하거나, 대나무 숲을 조성하거나, 고구마나 땅콩을 재배하는 방법이 있다(다카사키 소지,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조선의 민둥산과 씨름하던 그는 1931년 전국을 돌며 나무 심기 방법을 가르치는 강연에 나선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월과 3월, 아사카와 다쿠미는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부산, 청주, 서울 등 각지를 누비다가 심상치 않은 감기에 걸렸고 그예 쓰러지고 말았어. 급성폐렴이었지. 병세는 삽시간에 깊어졌어. 1931년 4월2일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그가 갑자기 벼락같이 부르짖었다고 해. “책임이 있다.” 어떤 책임이었을까. 식수기념일이 4월3일이었으니 관련 행사가 떠올랐던 것일까.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조선의 아름다움이 눈에 걸렸던 것일까. 아직도 처처에 남아 있던 조선의 붉은 민둥산이 가슴을 쳤던 것일까. 그리고 아사카와 다쿠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몰려나와 통곡했다고 해. 함께 일했던 조선인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단골로 물건을 사주었던 채소 장수 할머니, 청량리역 근처 술집 여성 종업원들, 친하게 지내던 스님들 모두가 엎드려 울었어. 관을 들겠다고 나선 조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 청량리에서 망우리로 이장되기 전 그가 묻힌 이문리로 가는 길목에서 조선 사람들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가족에게 울먹이며 부탁했다고 해. “조선식으로 노제를 지내게 해주십시오.” 가족의 뜻에 따라 한복을 수의로 입고 관에 들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예법을 거쳐 세상과 작별했단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쿠미의 형 노리타카는 수집품들을 한국에 기증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동생의 일기도 한국인 김성진씨에게 맡겼다고 해. 전쟁 와중에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기만은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김성진씨는 1996년 일본의 아사카와 형제 추모 모임에 소중히 거둬온 일기를 기증했단다. 그 일기를 통해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은 되살아나게 되었지.

한·일 간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돌아보는 일은 무척 힘겨운 일이야. 분노로 이마가 뜨거워지기도 하고, 억울함에 피가 거꾸로 솟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일을 자행할 수 있었나 주먹을 부르쥐며 일본이라는 이름에 발끈하게 되기도 하지. 우리가 미워할 것은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인간성을 파괴하는 범죄이지, 일본인 일반은 아닐 거야. 아사카와 다쿠미가 사랑한 조선과 그를 잊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소중할 것 같구나. 언제 한번 시간 내서 망우리에 가자꾸나. 아사카와 다쿠미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지 않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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