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지난 8월2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왼쪽부터)이 타이 방콕에서 외교장관 회담을 했다.

아시아 군사동맹이자 최대 우방인 한국과 일본의 무역분쟁으로 미국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미국도 이번 사안을 한·일 간의 단순한 무역분쟁으로 보지 않는다. 한·일 양국의 역사적 앙금을 폭발시킬 수 있는 정치적 ‘뇌관’으로 보는 데다, 미국이 특정국을 선호한다는 인상을 줄 경우 외교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때일수록 당연히 수행해야 할 동맹국 사이의 ‘정직한 중재자(honest broker)’ 역할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지난 8월2일, 타이 방콕에서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았다. 미국 측은 회담 직전, 한·일 양국이 일단 시간을 벌면서 사태 악화를 방지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분쟁중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을 맺으라고 제안했지만 일본의 거부로 무산됐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한·일 양국의 갈등이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가야 미국이 적극 개입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사실 과거에는 이 정도 한·일 갈등이면 양국의 동맹인 미국은 무엇보다 ‘동북아 지역 내 미국의 국가안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막후 외교 채널을 통해 적극 개입해왔다. 하지만 갈등의 근저에 양국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을 경우엔 다르다. 한반도 전문가이자 스탠퍼드 대학 학자인 댄 스나이더는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일 분쟁에 개입하길 꺼려왔고, 특히 역사 문제가 걸린 경우엔 더욱 그랬다”라고 〈시사IN〉에 말했다. 그는 특히 미국이 중재에 난색을 보이는 이유로 “역사 문제는 대부분 해결이 난망한 데다, 설령 미국이 개입해서 어떤 결론이 나온다 해도 욕을 먹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에서 동북아 분석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도 〈시사IN〉에 “역사적 갈등이 깔린 한·일 사안은 해결에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처럼 최고위층의 개입 없이는 수습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 부서가 한국보다 경제력이 훨씬 앞선 일본에 편향돼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측의 이해와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한국 정부 고위 관리들과 국회의원이 최근 줄줄이 워싱턴을 다녀갔다. 미국 측 반응은 신통치 않은 듯하다. 이번 사안에 대한 미국 내 관심 또한 크지 않다. 양국 분쟁이 확산 일로인데도 아직 미국의 주요 언론과 싱크탱크, 의회에서 북핵 문제에 비하면 주요 이슈로 부상하지 못했다. 이번처럼 중차대한 사안이 터졌을 경우를 대비해 미국 내 ‘친한(親韓)’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존 메릴 박사는 “워싱턴에서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진작시키려는 한국 정부의 외교 노력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한·일 양국의 갈등 확산에 전혀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정통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자 미국 국무부 역시 막후에서 양측 실무자들과 나름의 해소책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무부는 고위급 관리들이 개입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이 난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는 최근 백악관과 국무부 고위 인사들의 한·일 양국 연쇄 방문으로 이어졌다. 백악관에서는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매슈 포틴저 아시아담당 선임국장, 국무부에선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태담당 차관보 등이 최근 한·일 양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국 고위 관리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중재가 아닌 원칙론적 입장뿐이었다. 단적인 예로 스틸웰 차관보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만난 뒤 기자들에게 “근본적으로 한·일 양국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은 양국의 긴밀한 친구이자 동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하겠다”라고 말했다.

전통 맹방인 한·일 양국의 갈등이 확산 일로인데도 미국이 중재에 나서지 않는 것을 두고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아시아 국장을 지낸 에반 메데로스 조지타운 대학 교수는 최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아시아에서 위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미국 정부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 양국 갈등이 비단 무역뿐 아니라 미국의 동맹체제와 지역 번영 및 반도체 소재의 범세계적 공급망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촉구했다. 비영리 싱크탱크인 우드로 윌슨 센터의 고토 시호코 아시아 프로그램 부국장은 〈저팬 타임스〉에 실린 기고문에서 “사태가 악화되면 한국 기업은 물론 애플, 델 등 미국 기업과 미국 경제에도 큰 피해를 주는 만큼 미국이 지금이라도 ‘정직한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국, 2014년 한·일 갈등에 개입

과거의 전례를 보면 미국이 한·일 양국의 역사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2014년 당시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양국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자 국무부 고위 관리들은 물론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까지 한·일 양국 정상을 만나 적극 중재에 나선 전례가 있다. 당시 미국이 개입하게 된 이유는 뭘까? 미국의 국익과 직결된 안보 문제 때문이다. 2013년 11월 중국이 동중국해 상공에서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등 방위력을 증강했다. 한·미·일 공동 대응을 위해서도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가 더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국의 도발 직후인 그해 12월 바이든 부통령은 한·일 양국 순방길에 올라 적극 중재에 나섰다. 나중엔 오바마 대통령까지 개입해서 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미국의 중재가 늘 한국에 ‘최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이 중재의 결과물이 바로 2015년 12월28일 한·일 양국의 위안부 합의였다. 박근혜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일본과 부실 합의에 이른 것이다.

외교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대목도 바로 이 점이다. 존 메릴 박사는 “미국은 이번 사안이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주요 문제로 비화하면 지금보다 적극 중재에 나설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댄 스나이더도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물론 NSC, 국무부, 국방부 차원의 고위 실무선 이상에서 개입하려는 의사가 별로 없다. 하지만 한·일 양국이 전면적인 경제 전쟁에 돌입하거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취소 등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위협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미국도 적극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일 군사정보호협정이 파기될 경우 미국 정부는 북핵과 중국의 군사력 증강 등 자국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최근 외교 채널을 통해 이 같은 염려를 한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니 글레이저 아시아 담당 선임고문은 “이 협정이 실제 파기되면 대북 문제와 관련해 한·일 양국의 협력과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타격을 줄 것이다”라고 〈뉴욕타임스〉에서 지적했다.

일각에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압박해야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한·일 문제에 개입하려면 나의 전담(full-time)이 필요한 것 같다”라며 난색을 표한 바 있다. 이와 관련, 부시 행정부 시절 NSC 아시아 선임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 교수(조지타운 대학)는 한·일 갈등 해소 노력과 관련해 〈뉴욕타임스〉에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에 ‘우리는 한 팀’이라는 인식을 조성하는 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 개입을 촉구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