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니까 나도 맞을게”라고 말하는 남자 대학생을 등장시킨 HPV(Human Papilloma Virus· 인유두종 바이러스) 백신 광고가 등장했다. ‘나를 지키자’는 메시지보다 ‘나, 이런 남자야’를 어필하는 초남성 자아를 더 중요시하는 광고라니,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할까?
 
HPV는 현재까지 200종 이상이 발견되었고 이 중 40여 종이 인간의 생식기 및 구강 점막과 피부에 감염될 수 있다. HPV는 아주 흔한데, 성 접촉이 있었던 모든 인구의 80%가 일생 한 번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은 상당히 훌륭해서 대부분의 HPV를 자연 치료하면서 자연면역을 획득한다. 하지만 5~10%의 사람들에서 일부 바이러스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감염될 때 세포 변형이 시작된다. 여기서 또 일부는 암까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감염이 사라지면 세포 변형이 다시 좋아지기도 한다. 암이 되는 과정에는 HPV의 종류(암과 연관된 고위험군 14종), 흡연력, 개인의 유전적 취약성, 성관계를 시작한 연령, 성적 실천의 종류, 질식분만(자연분만) 횟수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정켈 그림
그런데도 왜 HPV를 둘러싸고 성별 갈등이 생길까. 일단 질병 부담이 다르다. 여성이 HPV에 취약한 부위는 자궁경부·질· 외음부·항문·직장·구강이고, 남성에게는 음경·항문·직장· 회음부·구강이다. 이 중 세포의 변화가 원래 활발한 자궁경부는 특히 취약한 기관이라, 자궁경부암은 유방암에 이어 여성암 중 제일 유병률이 높을 정도로 여성에게 질병 부담이 크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HPV가 여성만의 질환이 아니라는 데이터를 점점 쏟아내고 있다. 일단 비암성 HPV 질환인 피부사마귀와 호흡기사마귀는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빈도가 훨씬 높다. 그리고 HPV 질환 관련 부담 중 자궁경부암이 세포진 검진의 도입과 국가백신사업 도입으로 인해 줄어드는 반면, 구강암과 구인두암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이들은 남성에게서 훨씬 더 많은 질환이다. 마지막으로, HPV는 평생에 걸쳐 쉽게 접하고 쉽게 사라지지만, 이 과정에서 항체는 굉장히 약하게 생긴다. 특히 남성에게는 이 자연면역이 더 약하게 생긴다는 것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백신을 맞아 생기는 면역력은 자연면역에 비해 더 오래가고 강하게 남기 때문에 남녀 공히 모두 접종을 권장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18년 10월 HPV 백신 권장 접종 대상을 45세 이하 남녀로 재설정했고, 영국에서는 올해부터 남아에게도 HPV 백신을 무료로 접종하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된 HPV 백신 광고라면 성별에 상관없이,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에게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예방접종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
 
미국은 45세 이하 남녀 모두에게 백신 권장
 
아예 ‘비섹스’를 HPV 예방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자궁경부 전암병변으로 일부를 도려내는 원추절제술을 받은 40대 여성은 “남편한테 성관계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앞으로 암이 되지 않으려면 백신을 맞고 콘돔을 써야 한다는데, 남편의 ‘노 콘돔’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고, 성매개 감염이라는 낙인 때문에 설명과 대화는 어려우니 ‘금욕’ 처방전을 달라는 것이었다. 
 
섹스가 아닌 불통과 오해에서 생기는 문제다. 내 역할은 전문가의 권위에 기댄 금욕 처방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주고, HPV 백신을 권고하고 정기검진을 챙겨주며, 파트너를 만날 때 백신력과 질병력을 물어보고 콘돔을 사용하라고 격려하는 데 있다. 거짓 정보와 공포에 기반한 금지는 미세먼지가 발암물질이니 숨을 쉬지 말고, 사고 위험이 있으니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처방이다. 
기자명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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