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색과 모양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곳, 오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국민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곳. 서울에도 그런 학교가 여전히 많다. 학생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있는데도 지난 몇 년간 어떤 교육감도 조례를 위반하는 학교를 제재하지 않았다. 비판의 목소리는 커졌고 비로소 지난해, 서울시교육감은 두발자유를 선언했다.
그 뒤에 이상한 말이 붙었다. 공론화를 통해 학교별로 자율적으로 교칙을 제·개정하라는 것이다. 자유를 선언하긴 했는데 알아서 하라니. 조례도 있고, 헌법에서도 보장하고, 유엔아동권리협약에도 있어서 국가인권위에서도 시정 권고를 내리는 사안인데 서울시교육감은 뜬금없이 공론화를 통해 수정하란다.
어쨌든 교육감이 하라고 했으니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최근 공론화를 진행 중이다. 그 과정을 보니 학교에 대한 원망을 넘어 교육감을 향한 원망이 생긴다. 우선 교육청에선 공론화를 하고 의견 수렴을 하라고 하지만 학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교장 1명이 학생 500명 합친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곳이 학교이다 보니 교장의 의도대로 공론화위원회가 꾸려지고 그 회의 과정은 늘 비공개다.
의견 수렴을 한다고 하면서 대의원만 참석해 설명을 듣게 하고는 각 반의 의견을 대의원이 알아서 수렴해오도록 했다. 절차와 방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우왕좌왕했고 의견이 대충 모였는지 투표를 하라고 했다. 각 반의 투표수를 다 더할 줄 알았는데 반별로 채택된 의견을 1표로 하고는 그 수를 더했을 때 전체 학급 수의 과반을 넘지 않은 의견은 폐기한단다. 학생 수의 과반도 아니고 학급별 과반수라 실제 투표 결과와는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더니 제개정 위원회 위원인 교사는 “미국식 대통령 투표 방식 같은 것이니 문제가 없다”라고 한다. 대의원회의에서 학생들이 왜 체육복 등하교나 슬리퍼 교내 착용 같은 것은 의견을 냈는데도 검토하지 않느냐 질의하자 담당 교사는 “그런 의견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서 임의로 뺐다”라고 답변했다.
결국 두발자유와 같은 개성 실현 조항은 전체 24학급 중 11학급에서 원했으나 13학급에서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고, 체육복을 입고 등하교하게 해달라는 의견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아예 논의에서 제외됐다. 결국 살아남은 몇 개 조항에 대해서만 다시 전체 투표를 진행한다고 한다.
학생인권조례에서 보장한 두발자유, 교칙이 막아
학생 의견이 반영되는 비율은 50% 정도다. 나머지는 교사, 학부모의 비율이다. 언뜻 보면 학생들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는 것 같지만 숫자의 함정이 있다. 학생은 700명인데 50표를 가지고 있고 교사는 60명인데 25표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학생 5명의 동의보다 교사 한 사람의 반대가 더 힘이 세다. 교육감이나 교육청 공무원들은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이미 서울시민이 발의하고 서울시의회가 표결까지 해서 정한 학생인권조례에서 개성 실현의 자유를 보장하게끔 하고 있음에도 학교에선 교칙을 통해 못하게 막는다. 이것은 상위법을 위반하는 것이니 교육감은 학교들에 교칙을 바꾸라고 요구할 일이다. 교육감은 왜 학교에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고 공론화로 정하라고 했을까. 지금의 학교가 공론화를 잘 처리할 수 있을 만큼 민주적인 공간이라고 교육감은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교육감의 입장에서 결정을 하면 교장들의 원성이 커질 테니 공론화라는 이름으로 자기 책임을 미루는 것일까.
교사들의 체벌을 금지할 때 공론화를 했다면 아마 지금도 체벌하고 있을 것이다. 때론 교육감이 결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 학생이 아무리 투표권이 없어도 그렇지, 이렇게 학생인권을 다수결로 하라는 것은 정말 비겁한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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