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가 출발하자 아까 그 중국인 남녀가 말을 걸어왔다. 둘은 신혼여행 중이고 광저우에서 산다고 했다. 자동차는 2008년 쓰촨성을 뒤흔들었던 대지진의 진앙을 거쳐 갔다. 3년이나 지났건만 폐허였다. 남자가 말했다. “이곳이 왜 여전히 폐허인 줄 아니? 중국 홍십자회(적십자사) 대표가 대지진 때 전국에서 걷힌 성금을 유용했어. 그래서 지금도 이곳이 이렇게 폐허인 거야.”
실제로 당시 중국 홍십자회는 무려 약 3조7000억원에 달하는 성금을 걷었는데, 이 중에 사용처가 공개된 성금은 고작 8000억원이라는 보도를 본 기억이 있었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특히 자국 정치에 대한 불만이 우리를 가깝게 했다. “한국은 좋겠다. 너희 나라는 ‘Freedom Country’잖아.”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중국인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혹시 이들이 중국 공안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런 이야길 하는 중국 사람은 처음 봐.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거 말야.”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홍콩을 여행하면서부터야.”
최근 나는 홍콩에 다녀왔다. 홍콩 가이드북 추가 취재를 위한 여행이었다. 여행 일정을 톈안먼 사태 30주년인 6월4일로 맞춰 잡았다. ‘범죄인 인도 법안’ 문제로 들끓는 홍콩 분위기상 6월4일부터 대대적인 시위가 이어지리라 봤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몽콕에 있는 6·4 기념박물관을 찾았다. 마침 방문한 시간대에 몇몇 단체의 기자회견도 있었다. 몇 마디 묻고는 자리를 뜨는데 웬 젊은 남성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니? 난 선전에서 왔어.” “홍콩이 아니라 중국에 사는데, 여길 왔다고? 시 주석이 널 싫어하지 않을까?” “상관없어. 나 작년에 망월동 5·18 묘역도 다녀온 적 있어.” 그는 저녁 집회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홍콩 시위에서 확인한 만리장성의 균열
6월4일 오후 홍콩의 뉴스 채널은 빅토리아 공원에 일찌감치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조명했다. 그 가운데 몇몇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자막을 통해 그들이 선전이나 광저우 같은 중국 도시에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2011년 쓰촨성으로 가는 지프에서 만났던 중국인 부부를 떠올렸다. 시간이 흘러 2019년 이제 그런 이들은 더욱 늘어났다. 그들은 홍콩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사이 중국이 네이버를 막았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중국이 수많은 나라의 비웃음을 받아가며 만리방화벽을 구축하고, 외국 소식을 차단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만난 사람들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언제까지 그들의 염원을 막을 수 있을까. 언젠가 한국의 망월동에서 수많은 중국인을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번 홍콩 시위에서 나는 만리장성의 작은 균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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