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레몬 반쪽을 잘게 썰어 도시락 통에 담았다. 물기가 마르지 않도록 비닐 랩으로 두 번 감쌌다. 최루 가스를 마셨을 때 레몬 슬라이스를 입에 물고 있으면 기침이 잦아든다고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LIHKG’에서 얻은 팁이었다. LIHKG에는 ‘시위 중 체포당했을 때는 이렇게 하세요’ ‘법률 지원해드립니다’와 같은 유용한 정보가 많이 올라왔다. 6월16일 집을 나서는 호이키 영 씨(27)의 가방에는 레몬 외에도 검은색 여벌 옷, 얼린 물, 우산, 고글, 마스크가 담겼다. “혹시 그때처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나흘 전인 6월12일 호이키 씨는 경찰이 뿌린 최루가스를 얼굴에 맞았다. 부모에게 집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종이 가방에 헬멧을 몰래 담아 집을 나왔다.

집회에 참여하기 전 백합 한 송이를 샀다. 애드미럴티 지역은 홍콩 입법회와 정부종합청사가 몰려 있는 곳이다. 행정장관 집무실도 이곳에 있다. 6월15일 오후 4시경 애드미럴티 지역에 있는 쇼핑센터 건물 옥상에 한 남성이 올랐다. 그는 캐리 람 행정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힌 직후 노란 우비를 입고 건물 옥상에 나타났다. 남성이 건물 난간에 붙인 종이는 두 장이었다. ‘No Extradition to China(중국으로 송환하지 말라)’는 영어로,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캐리 람은 퇴진하라’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라는 메시지는 광둥어로 쓰여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은 애가 탔다. “정부는 그저 시간 끌기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논란이 잠잠해지면 언제든 다시 진행될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저희는 철회를 요구하고 있어요.” 건물 옥상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한 시민이 말했다. 다섯 시간의 대치 끝에 저녁 9시쯤 남성은 결국 난간을 넘었다. 소방관 4명이 붙잡았지만 끝내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남성이 떨어진 자리에는 백합과 국화꽃이 더미로 쌓여갔다. 6월16일 오전, 호이키 씨처럼 집회에 참여하기 전에 이곳을 들른 추모객들이 많았다. 모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초점 없이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지미 씨(36)는 부채의식을 느껴 이날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남성은 30대 중반의 사회복지사로 2014년 우산혁명에 참여했다. 그가 우산혁명의 상징색인 노란 우비를 입고 있었던 이유다. “좌절스럽고 무기력해요. 정부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해요. 정부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이 해마다 쌓여갔어요. 그의 죽음은 홍콩의 현재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2007년 후진타오 주석 시절 홍콩 반환 20주년이 되는 2017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014년 시진핑 주석이 이끄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전인대 상무위)가 내놓은 직선제 방안은 2007년의 약속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내용이었다. 전인대 상무위 방안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이 1200명의 후보추천위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애국애항(중국과 홍콩을 모두 사랑한다는 뜻)’ 인사 중 2~3명의 입후보자를 추린다. 홍콩 시민들은 중국이 추천한 후보 중에서만 행정장관을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시사IN 이명익
2019년 홍콩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호이키 영 씨는 “홍콩의 핵심 가치는 자유”라고 말했다. 그는 우산혁명 때도 한 달 이상 거리에 나섰다.

이번 시위가 우산혁명과 다른 점

2014년 당시 홍콩 시민들은 ‘진짜’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간 거리를 누볐다.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뿌린 최루가스를 우산으로 막아내면서 ‘우산’은 홍콩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홍콩에서는 우산혁명(revolution) 대신 우산운동(movement)이라는 표현을 쓴다. 2014년 시위가 끝내 실패했기 때문이다. 2017년 7월 제5대 홍콩 행정장관에 오른 캐리 람은 그 결과였다.

2014년 호이키 씨는 광고홍보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대표자를 직접 뽑고 싶어서” 우산운동에 참여했다. 입법회가 있는 애드미럴티 지역을 40여 일간 지켰다. 잠은 텐트에서 자고, 학교의 스포츠 센터에서 샤워를 하면서 버텼다. “홍콩의 선거제도는 공정하지 않거든요. 행정장관이 시민들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하고 있어요.”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온 뒤 한 동안 뉴스를 보지 않았다. 공허함과 우울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홍콩을 떠나고 싶어 워킹 홀리데이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졸업 이후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그는 “이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라고 강조했다. “우산운동이 새로운 제도를 요구한 싸움이었다면, 이번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집회는 홍콩 시민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지키는 싸움이에요. 자유는 홍콩의 핵심 가치에요. 중국 정부에게 이를 알리고 싶었어요.”

103만명으로는 부족했다. 6월12일은 범죄인 인도 법안 2차 심의가 예정된 날이었다. 이미 6월9일 열린 반대 집회에 시민 약 103만명이 참여했지만, 정부는 범죄인 인도 법안 입안 절차를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법안의 도화선이 된 살인사건처럼 초국적 범죄에 대해 국제적인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설명이었다(22~25쪽 기사 참조). 홍콩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2차 심의를 막겠다는 의지가 텔레그램, 페이스북, LIHKG 등을 통해 빠르게 퍼졌다. 이번 집회에 1990년대 생들의 참여가 활발했던 이유다. 이미 6월11일 밤부터 입법회 주변을 점거한 시민들도 있었다.

경찰은 이날 물대포와 고무탄, 최루탄, 최루액을 사용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날은 정말 경찰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어요. 아직도 왜 그렇게까지 진압을 해야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아요.” 호이키 씨는 “학생, 노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했다”라고 말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시위대 중 일부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이날 부상자가 총 72명 발생했고, 이 중 2명은 크게 다쳤다. 당시 시위를 취재하던 외신 기자 한 명도 부상을 당했다.

ⓒ시사IN 이명익
6월15일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한 시위자가 정부청사 인근 공사장 옥상에 올라 시위를 하고 있다.

애드미럴티 곳곳에는 6월12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찰 진압을 막기 위해 시위대가 잡았던 펜스들은 마구 뒤엉켜 있었다. 법안 심의는 연기되었지만, 홍콩 사회가 받은 상처와 충격이 컸다. 6월12일 직후부터 사흘간 입법회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위에는 경찰이 깔렸고 신원을 확인하며 통행을 통제했다. 같은 날 시위 정보를 공유하는 주 채널이었던 한 텔레그램 방 운영자가 IT 범죄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호이키 씨도 그 방에 포함돼 있었다. “지금은 다 나갔어요. 새로 방이 만들어지긴 했는데, ‘화이트 테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전만큼 많은 인원은 아니에요.” 텔레그램 등 온라인상 모임을 방해하기 위한 각종 시도를 홍콩 시민들은 ‘화이트 테러’라고 불렀다.

경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6월12일 이후 사흘간 수많은 홍콩 시민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이 구름다리를 찾았다. 검은색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과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표시였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감춘 이들도 많았다. 켈리 씨(20)는 신원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날 텔레그램 운영자 외에도 학생들이 많이 체포됐어요. 이후 사람들이 집회에 나서기를 많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모여 있는 사람들 쪽으로 카메라를 들자 찍지 말아달라는 요구도 빗발쳤다. “얼굴을 공개하기 싫어요. 중국 정부가 시위 참여자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조심해야 해요.” 마스크를 쓴 한 10대 참가자가 말했다. 이들이 보기에 이미 중국 정부의 검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홍콩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파괴되고 있다며 우려하는 이도 있었다.

대신 카메라 앞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벽에 나붙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쏘지 마세요’ ‘홍콩을 구해주세요’ ‘우리는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입니다’라는 호소가 벽을 타고 사방으로 번져갔다. 벽에 나붙은 메시지만큼이나 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동기 역시 다양했다. 법안에 반대하기 위해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식들이 홍콩의 현재를 기억하길 바라면서, 중국 정부에 우리만의 생각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홍콩에 망명 오는 중국의 활동가들을 위해서, 캐리 람 행정장관이 틀렸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서….

홍콩 시민들은 이번 집회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주최자”라고 입을 모았다. 크리스 영 홍콩기자협회장은 “2014년 우산운동 때는 조슈아 웡(20쪽 상자 기사 참조)이라는 활동가가 시위를 주도했지만, 이번에는 모두 자발적으로 SNS를 통해서 시위를 홍보하고 조직하고 참여했다. 범죄인 인도 법안이 통과되어 시행됐을 때 중국으로 추방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홍콩 시민들에게 아주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홍콩 정부청사 앞 도로에서 6월17일 비무장 경찰이 시위대에 해산을 권유하 러 내려오고 있다.

6월16일 오후 2시. 기온은 29℃로 높지 않았지만 습도가 75%에 달했다. 숨만 쉬어도 인중에 땀방울이 맺혔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입법회와 중앙정부청사가 모여 있는 애드미럴티 지역까지 걷는 ‘검은 대행진’에 참여하기 위한 행렬은 홍콩 지하철 아일랜드 라인 거의 모든 역에서부터 시작됐다.

10대 자원봉사자들, 새로운 블랙 세대

호이키 씨도 빅토리아 공원으로 향했다. 번화가가 몰려 있는 빅토리아 공원 인근에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뿐이었다. 사람들은 가슴에 흰 리본을 달거나 가방에 백합 한 송이를 꽂았다. 전날 사망한 남성을 추모하는 표시였다. 공원 한쪽에서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람들에게 나눠줄 백합을 종이로 접고 있었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시위대의 사진과 ‘캐리 람 퇴진하라’ ‘악법을 철회하라’ 등이 쓰인 피켓을 나눠주는 이들도 길목마다 서 있었다. 모두 10대 자원봉사자들이었다. 한 참가자는 자발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을 “새로운 블랙 세대(New black generation)”라고 불렀다.  

행진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집회 참가자들이 몰려들면서 빅토리아 공원 인근 도로에 정체 현상이 발생했다. 2시간 동안 고작 2m밖에 움직일 수 없었던 구역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응급조치가 필요한 사람이 생기자 구급대원이 인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세를 웅크리고, 재빠르게 길을 터줬다.

사람들은 포스트잇에 적었던 구호들을 행진 내내 쉬지 않고 외쳤다. ‘캐리 람 퇴진하라’ ‘악법을 철폐하라’ 한 명이 외치면 수백명이 답했다. 수백명이 답하자 홍콩의 고층 건물 사이가 울렸다. 간신히 대열에서 빠져나와 육교로 올라가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산인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다시 썰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검은 대열의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봐요. 기적 같은 일입니다. 홍콩 시민들이 서로 강하게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육교 위에서 하염없이 움직이는 검은 대열을 바라보며 킨 씨(30)가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시위에 참석한 인원은 약 200만명으로 추산됐다. 홍콩 전체 인구 748만명 중 4분의 1 이상이 참여한 셈이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벌어진 시위 중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6월9일 103만명이었다. 이 기록이 6월16일 일주일 만에 깨졌다.

호이키 씨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애드미럴티 지역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걸어서 40분이 걸릴 거리였지만 이날은 5시간 넘게 걸렸다. 온몸이 땀에 절어 끈적끈적했다. 자원봉사자가 생수 한 병을 건넸다. 애드미럴티 곳곳에는 물, 과자, 밴드부터 헬멧, 고글 등을 공급하는 구호 물품 배급소가 임시로 만들어졌다. 물품은 모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했다. “한동안 홍콩을 떠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 돕는 걸 보니 아직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행스럽게도 이날 호이키 씨가 레몬을 입에 물 일은 없었다. 그러나 긴장을 늦출 생각은 없다. 6월16일 캐리 람 행정장관이 다시 성명을 발표했다. “범죄인 인도 법안과 관련한 개정을 중단할 예정입니다. 국민들에게 실망과 슬픔을 안겨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호이키 씨는 여전히 답답했다. 법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게 바뀐 게 없어요. 법안 철회도, 경찰 진압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도,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는 다른 시위자들과 입법회 앞 도로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 공간을 지켜야 목소리가 전해질 것 같았다. 우산운동 이후 5년 만이었다. 경찰이 언제 급습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호이키 씨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밤새 ‘Sing hallelujah to the lord’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사IN 이명익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와 범죄인 인도 법안 폐지를 요구하며 밤을 새운 시위대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산하던 도로에 긴장감이 돈 건 6월17일 아침 8시께였다. 시위대는 헬멧과 고글, 방독면을 쓰기 시작했다. 상황을 눈치 챈 취재진들도 ‘press’가 쓰인 형광색 조끼를 입은 뒤 카메라를 잡았다. 도로 끝에서 경찰 수백명이 대열을 맞춰 내려오고 있었다. 호이키 씨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찰은 시위대와 고작 30m 간격을 두고 섰다. 중형 스피커 두 대에서 쩌렁쩌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차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세요. 시위가 끝났으니 이 길은 정상 운행되어야 합니다.” 시위대는 각자 격앙된 목소리로 야유했다. “경찰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기를 든 적이 없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해라!”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시위대 사이로 체포될 경우 법률 지원을 해준다는 내용이 담긴 카드가 뿌려지고 있었다. 1시간 동안 대치 상황이 계속되자 경찰은 끝내 마이크를 내렸다. 철수하겠다는 신호였다. 돌아서는 경찰의 등을 향해 일부는 박수를 치고, 일부는 울부짖었다.

경찰이 떠났지만 다음 계획은 없었다. 이곳에 계속 남을지 이동할지 의견이 갈렸다. 계속 남는다면 다른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결국 시위대가 나쁜 인상을 남길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이 집회에는 명령을 내리는 리더가 없어요. 그 말인즉 매번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에요.” 빈 도로 한중간에서 시위대들이 모여 다수결 투표를 하고, 설득을 이어갔다. 결국 오전 10시쯤 도로를 비우기로 합의했다. 일부 시민들은 까만색 봉투를 들어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환경미화원의 적은 아니니까요.” 어지러웠던 도로가 금세 말끔해졌다.

호이키 씨를 포함한 시위대들은 입법회 근처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우산운동 때보다 사람들이 좀 더 현명해진 것 같아요. 계속 이곳을 막고 있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30분 뒤 버스가 지나다니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호이키 씨는 6월17일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6월17일과 18일에도 시위대는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언리미티드(Unlimited)’라는 홍콩 가요를 기타로 치며 함께 불렀다. 사회복지사인 리버 초이 씨(50)는 퇴근 후 곧장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낸다. “홍콩의 일부가 되고 싶어서”다. 티파니 씨(15)는 화학책을 펴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곧 학력평가 시험이 있다. 부모에게 도서관이 아닌 거리에 나와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까요.”

각자 할 일을 하던 이들은 6월18일 오후 4시, 캐리 람 행정장관의 공식 사과 기자회견이 열리자 모두 휴대전화를 꺼냈다. 반대 시위가 본격화된 6월9일 이후 캐리 람 행정장관이 가진 세 번째 기자회견이었다. 이날도 캐리 람 행정장관은 끝내 ‘철회’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길게 탄식했다.

 

“우산혁명보다 더 발전”

홍콩 ‘우산혁명’의 주역인 조슈아 웡(사진)이 200만명이 모인 집회 다음 날인 6월17일 출소했다. 감옥을 나온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지난달 홍콩 대법원이 시위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은 혐의로 징역 2개월을 확정하면서 재수감됐지만 이날 조기 출소했다. 그는 출소 직후 입법회가 있는 애드미럴티 역을 찾았다. 6월17일에도 여전히 시위대 수십명이 남아 있었다. 조슈아 웡과 인터뷰를 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요즘 인터뷰 일정이 빽빽하게 차 있어서요. 3시25분부터 3시45분까지 가능할까요?” 약속 장소로 가자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온 다른 외신 기자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사IN 이명익

6월16일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어떻게 보았나? 

감옥에서 텔레비전으로 현장을 지켜봤다.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캐리 람 행정장관이 이 법안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것으로 우리는 성과를 끌어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악법을 철회하고, 경찰의 폭력과 시민을 폭도라 지칭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홍콩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며 촛불시위를 많이 떠올린다. 

실제 2016년에 발생한 한국의 촛불시위가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 효율적이고 지속적이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4월3일 입법회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에 대한 1차 심사가 통과된 직후부터 시위가 열렸고, 사람들도 꾸준히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1987〉 〈택시운전사〉 〈변호인〉 등 한국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도 모두 봤다. 정말 훌륭했다. 특히 정권에 대항해 학생들이 나선 1987년 민주화운동은 정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다른 홍콩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마 둘 중 한 명은 봤다고 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나는 홍콩이 여전히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서 많은 관문을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우리도 6월9일에 100만, 6월16일에는 두 배인 200만명이 모였다. 

2014년 우산운동과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5년 전에 우리는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지만 성취하지 못했다. 거리를 점거했던 텐트가 철거될 때 우리는 “다시 돌아오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5년 이후에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더 단단하게 결집하고 있다. 2014년과 비교해서 운동의 전략, 방향, 방식이 좀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그때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위의 특징이 시위를 조직하는 리더가 없다는 점이다. 각자의 이유와 동기를 갖고 거리에 나왔다. 

앞으로의 계획은?

캐리 람은 정권 임기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신뢰를 얻는 데만 관심 있지,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직선제를 얻지 못하면 홍콩 대표는 계속해서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직선제 쟁취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가 5년 전에 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자명 홍콩/글 김영화 기자, 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