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명을 죽인 청년은 자신의 손에 난 상처를 걱정했다. 방아쇠를 당길 때 튄 피해자의 뼛조각이 스친 자국이었다. 저자인 예이르 리페스타드는 2011년 노르웨이 오슬로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의 변호를 수락하며 그의 상처 난 손과 악수한다. 리페스타드는 브레이비크가 왕성한 식욕으로 피자와 콜라를 먹어치우는 것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브레이비크는 살아 있다. 생명이야말로 내가 변호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브레이비크는 생명을 무시하고 파괴했지만, 바로 이 생명의 일부다.” 그러나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자’의 변호사에게 숱한 비난과 욕설, 심지어 협박이 쏟아졌다.
이때 리페스타드에게 용기를 준 것은 노르웨이 일간지 〈아프텐포스텐〉의 정치부 기자 하랄 스탕헬레가 쓴 칼럼이었다. “최악의 범죄자는 최고의 변호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라는 노르웨이의 전설적인 변호사 알프 노르후스의 말을 인용한 스탕헬레는 ‘살인범의 변호사는 그저 변호인 그 이상이며, 변호사는 법치국가에 종사하는 공복’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리페스타드를 ‘노르웨이 사회가 법치국가로 남도록 지켜주는 사람’이며, 여기서 법치국가란 ‘브레이비크가 파괴하려고 한 바로 그 체계’임을 강조한다. 리페스타드는 브레이비크의 변호를 맡은 뒤 처음으로 기자들 앞에 서기 전, 자신이 노란색 메모지에 썼던 ‘품위, 침착, 솔직함’을 때때로 꺼내보며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끊임없이 상기했다. 그는 무사히 변호 임무를 완수했고, 2012년 8월 브레이비크는 징역 21년형을 선고받았다. 브레이비크는 자신이 받은 형벌에 만족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각지에서 각종 살인 사건 소식이 들려오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저 범죄자가 과연 인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든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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