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19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크림반도로 휴가를 갔다가 억류되었다. 공산주의 체제 복귀를 꾀하던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이끄는 공산당 강경파와 군부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인 ‘화이트하우스’로 들어간다. 옐친이 화이트하우스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모스크바 시민들은 의회 앞에 운집해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8월20일 화이트하우스를 공격하느냐 마느냐로 군부가 갑론을박을 벌이는 사이,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옐친 편의 코베츠 장군이 화이트하우스 방어를 지휘했다. 쿠데타 측에 있던 특수부대는 시민들의 피해를 우려해 화이트하우스 공격을 망설였다. 결국 특수부대는 화이트하우스 공격을 포기했고, 쿠데타 군은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후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로 복귀하지만 그 역시 밀려나고 소련 해체가 시작된다.

데모스 팀, 렐콤 네트워크망 통해 옐친 발표문 뿌려

ⓒAP Photo1991년 8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탱크 위에서 성명을 읽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러시아 인터넷의 개척자들이 있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소련의 MIT에 비유할 수 있으며, 본업은 원자력 연구소였다)는 유닉스 운영체제와 유사한 데모스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소련  내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망을 구축했다. 이 내부 네트워크망이 렐콤이다. 쿠르차토프의 인재들은 렐콤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화선에 의존하는 렐콤 네트워크망을 1991년, 핀란드 헬싱키 대학과 연결한다. 소련 최초로 서방과 연결되었다. ‘공식’ 서버는 쿠르차토프 연구소에 있던 IBM PC 386으로 모뎀은 9600bps짜리였다. 물론 ‘비공식’ 백업 서버도 두 개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8월19일 마침 모스크바에서 컴퓨터 박람회가 열렸다. 연구팀은 급하게 데모스·렐콤 프로그래머들을 비공식 백업 서버가 있는 곳에 모았다. 그날 오후, 옐친 쪽에서 보냈다는 한 사람이 연구팀의 문을 두드린다. 그는 데모스니 렐콤이니 하는 네트워크의 개념을 알고 온 게 아니었다. 그저 옐친의 발표문을 복사할 복사기가 안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연구팀은 자신들이 컴퓨터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며, 네트워크망을 통해 퍼뜨리면 된다고 오히려 그를 설득했다. 무슨 말인지 몰랐던 그는 그냥 되돌아갔다.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또 문을 두드린다. 그는 코베츠 장군이 보낸 인물이었다. 코베츠는 원래 소련 군부 내에서 통신 특기자였기 때문에 통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데모스 팀은 렐콤 네트워크망을 통해 옐친의 발표문을 뿌리기 시작한다.

마크 앤드리슨이 모자이크 웹브라우저를 만든 것이 1993년이었으니, 웹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8월20일 CNN 모스크바 특파원이 보도에서 렐콤을 언급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다행히 쿠데타 군은 네트워크망에 대해 무지했다. 폴리나 안토노바로 알려진 데모스 팀의 한 여자 프로그래머가 미국으로 이메일을 보낸다. KGB 때문에 소련 내 모든 방송통신망이 막혔지만 인터넷망이 살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래리 프레스 컴퓨터학과 교수는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연구팀은 계속 소련 내 소식을 미국에 알렸고, 미국에서 온 정보를 소련 내로 전파했다. 군대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만 배치됐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등 군 움직임을 파악해 전 세계에 알렸다. 쿠데타 기간에 세상이 소련의 인터넷 통신에 의존했다는 의미다. 프로그래머들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으며, 누구의 승인도 받지 않았다. 그냥 했다. 겨우 얻어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기자명 위민복 (외교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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