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했다. 글 텍스트를 모두 옮겨 적어본 것이다. 왜 그러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이 이야기는 들춰보고 뜯어볼 일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대로 폭 잠겨야 할 것 같았다. 수많은 노래로 친숙한 작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조곤조곤 흐르고 있는데, 그걸 멈춰 세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 날 저 멀리 어디에선가 불처럼 빛나는 꼬리를 지닌 혜성이 나타났어요. 작은 별은 반가운 마음에 물었어요. ‘혜성아, 안녕! 내 친구가… 되어줄래?’” 혜성은 들은 체 만 체 쏜살같이 날아가버리고, 섭섭한 작은 별은 으앙 울음을 터뜨린다. 그로부터 76년 뒤, 다시 혜성이 나타난다. 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지난번엔 미안했어. 너무 빨리 지나가느라… 그래, 우리 친구가 되자!” 그러고는 또 엄청난 속도로 멀어진다. 하지만 작은 별은 이제 외롭지 않다! 76년 뒤에 다시 만날 친구가 생겼으니.
내용을 소개하자고 단어와 문장을 잘라내고 뭉쳐놓으니 작은 별과 혜성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그들의 외로움, 반가움, 섭섭함, 미안함, 기쁨과 설렘을 이렇게 훼손하면 안 되는 건데.
76년은 인간에게 거의 인생 전체인 기간이라 그런 오랜 기다림은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단 세 문장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허망한 만남, 그리고 다시 똑같은 기다림이라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야기의 무대가 우주라는 점을 다시 떠올린다. 인간은 우주가 137억 광년 전에 탄생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130억 광년 전의 우주에서 온 빛을 잡아 사진을 찍어낼 수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76년이 얼마나 찰나 중의 찰나에 불과한 순간인지도 헤아릴 수 있다. 먹먹하던 가슴이 그득해진다. 작은 별이 눈 두어 번 깜빡이고 나면, 혜성이 빛나는 꼬리를 서너 번 흔들고 나면, 둘은 다시 만날 것이다. 세 문장씩 나누는 대화가 모여 은하수처럼 흐르는 사연이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책 한 권에 담긴 시간의 감각
작은 그림책 한 권이 시간에 대한 생각과 감각을 이렇게 퍼져나가게 한다. 1초가 1년 같은 고난의 시간도 있겠지만, 10년을 1분처럼 흘려보낼 수 있는 보상의 순간도 있다. 남이 정한 시간의 노예로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만들어낸 시간 속에서 나를 지켜나갈 수 있다. 쏜살같이 지나간 누군가가 영원히 되돌아오고 또 되돌아올 친구임을 믿을 수 있다. 혼자 남겨졌으면서도 ‘아주 가끔씩이기는 하지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니’ 외롭지 않은 작은 별처럼 나를 위로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성과 감성과 상상을 합해 시간을 탐구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면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의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다시 만날 생각에 언제나 두근두근 설레며 넓은 우주에서 눈부시게 빛날 수 있었”던 작은 별과 혜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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