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예멘에서 온 친구들의 한국어 수업에 갑니다.” 이 문장을 편한 마음으로 말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제주에 입국한 예멘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보니 가족에게도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제주 내 작가들과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며 지내다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갖게 되어 이사·임신·출산·육아를 밀린 숙제처럼 해치우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가 이토록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겁 없이 덤비던 나는 임신과 출산 기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와 가족, 개인 작업과 살림 이외의 활동이 매우 피곤했으며, 정치·사회·경제 문제 따위는 너무나 멀었다.

예멘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곳에서 다들 너무 힘들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모임에서 〈제주투데이〉 김재훈 기자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내게 2018년 7월부터 예멘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는 모임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떤 신호처럼 다가왔다. 당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꽤 오래 웅크려 있었는데 이제 좀 나가도 좋을 것 같아서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힘들었는데, 에너지가 조금씩 생긴 것 같아요.”

ⓒ시사IN 이명익김국희씨(오른쪽)와 아흐메드 씨가 동화책 만들기 시간에 만든 글과 그림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흐메드 씨는 예멘 내전 이후 징집을 거부해 조국을 떠났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갈증 탓이었을까. 간만의 외부 활동이 기다려졌다. 초급과 중급으로 나뉘어 요일별로 배분된 수업에 참여하는 선생님은 모두 10명 정도였다. 지난해 10월2일 내가 첫 수업을 시작했을 때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태도로 선생의 자리에 서 있는 나에게 예멘인들은 환대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를 지극한 태도로 반겨주었다. 그런 무조건적인 기대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멘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환대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교실로 가지 못했다. 제주는 물론이고 많은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나는 낯선 곳에서도 익숙한 것처럼 행동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서툴게 보여선 안 돼’라는 생각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수업을 잘못하면 안 된다’라는 긴장이 더 컸다.

한국어를 처음 접하는 이에게 서툰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생각보다 당황스러웠다. 어떤 순간도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보스,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는 뭐라고 하면 돼요?” “근데 선생님 진짜 결혼했어요? 아이는 몇 살이에요?” “나는 코리안 알파벳을 먼저 배우고 싶어요” 등등 모든 상황과 말이 섞여 아수라장이었다. 20명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고, 누가 누군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시간만 빠르게 지나갔다.

식은땀 흘리며 수업을 마친 내게 그들은 ‘말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말릭은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부담스러워서 쓰지 않았더니 최근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샤허드’, 절벽에서만 나는 품질 좋은 꿀의 명칭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었다.

수업이 익숙해지면서 일터나 생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국어 표현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짰다. 수업에 참여했던 친구 두 명이 거리에서 갑자기 구타당했던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에는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 요청하는 법, 오해를 푸는 법, 예멘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법 등 한국인의 정서와 태도에 맞춘 말하기에 대해 중점적으로 수업하기도 했다. 무언가 계속 부족한 느낌이었다. 준비한 수업을 잘 전달하고 온 날도 그랬다. 모하메드, 무하메드, 무함마드처럼 실제로 같은지 다른지조차 모르겠는 비슷한 이름도 너무 많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몇 번의 수업이 지난 뒤에야 한 사람 한 사람이 ‘난민’이라는 집단이 아닌, 단 한 명밖에 없는 ‘친구’로 인식되었다. 수업을 시작하고 석 달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수업 시간이 즐거워지면서 아쉬움도 그만큼 커졌다. 함께 동화책을 만들자고 예멘 친구들을 붙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화책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가장 쉬운 틀이다. 단박에 동화책 모임이 꾸려졌다. 와츠앱에 동화책 모임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다. 채팅방 이름은 ‘크리에이터들’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적고 그림을 그렸다. 그사이 제주를 떠나는 친구가 많아지면서 책 형태로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진솔하게 적어준 이야기는 잘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꼭 책 형태로 엮어서 함께 읽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동화책 만들기 수업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암젯 씨(32)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를 MJ라고 편하게 불렀다. MJ는 예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게 된 MJ가 일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나는 한국어가 서툰 그의 면접에 함께 따라가 주기도 했다. 면접 동행을 계기로 우리는 부쩍 친해졌다. 이후 친구들과 저녁밥을 함께 먹을 때 MJ도 초대했다. 나중에는 함께 전시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너 같은 친구는 처음이야”

집 앞 공원 놀이터에 아들과 다른 친구, MJ와 산책을 나갔던 지난 2월의 어느 날이었다. MJ와 아들이 함께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어떤 음악을 들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예멘 음악은 뭐가 있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마침 내겐 나라별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 애플리케이션이 있었다. 앱을 실행하니 세계지도가 화면에 가득 찼다. 나는 MJ에게 예멘이 어디쯤 있는지 물었다. MJ의 손가락을 따라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을 넘어 이란과 이라크를 지나니 예멘이 보였다.

겨울이 한창이었지만 MJ의 옷은 얇았다. “MJ, 춥지 않아? 다른 친구들은 다들 춥다고 패딩 입고 다니던데 너 지금 옷이 너무 얇아.” “아냐. 전혀 춥지 않아.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 나는 내 예멘 친구들 중 한국 친구의 집에 개인적으로 초대받은 최초의 사람이야.” MJ가 크게 웃었다. 나는 스크린에 뜬 예멘 지도에 손끝을 갖다 댔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예멘의 오래된 아주 유명한 노래라고 했다.

아들이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다가 기차 모양 놀이기구 안으로 들어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손 흔드는 아이를 바라보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MJ도, 함께 있던 내 친구도 나를 보며 크게 웃었다. MJ는 너 같은 친구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모든 친구는 당연히 새로운 한 사람이니, 당연히 나도 MJ 같은 친구는 처음이었다. MJ는 현재 강원도 원주의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한다. MJ는 제주를 떠났지만 우리의 한국어 수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기자명 김국희 (제주 예멘인 한국어교실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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