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가 지난 1월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한국 지배 엘리트들의 ‘주류 의식’에 대한 중요한 문서로 여겨져야 한다. 이들이 누구를 비주류로 여기며 자신들을 구분하고 있는지, 또한 비주류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되고 있는지를 이 문서는 짧지만 강력하게 드러내주었다. 한 줄 한 줄 의미심장하게 읽어야 한다.

한국의 주류에 대해서 두꺼운 읽기가 가능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서지현 검사가 문제 제기하는 법조 분야에서는 김두식 교수의 〈불멸의 신성가족〉과 최근에 나온 〈법률가들〉이 독보적이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김두식은 흥미롭게도 법조계 문제를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법은 언어다. 매우 폐쇄적인 언어다. 그 말을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언어다. 이 언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배제된다. 보통 사람이 법의 언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시험에 붙어서 이 언어에 대한 ‘자격증’을 얻은 법조인은 법조인이 아닌 사람을 문자 그대로의 야만인(제대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하게 된다. 언어가 사람과 사람 아닌 자를 가른다.

서지현 검사의 경험은 ‘같은’ 법조인이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법의 언어를 안다고 하더라도 모든 말을 법이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부터 법은, 그 자신의 오만한 약속을 스스로 위반한다. 법은 자기에게 기입된 말을 하는 한, 누구의 말인지 가리지 않고 다 듣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법은 자신에게 기입된 말조차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우일

법이 언어에 대한 독점으로 인간과 인간 아닌 자를 구분한다는 것은 여기서 기만으로 폭로된다. 언어 이전에 법은 이미 존재를 가르고 따진다. 눈을 가려서 사람을 보지 않고 말만 듣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 그 안대는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상대의 지위를 살펴보는 스카우트(신분 측정기)였던 셈이다. 사람의 지위는 애초부터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한번 비주류로 분류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영원히 비주류가 된다.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글에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004년 4월에 법무관을 마치고 임관한 검사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어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에게 임명장을 받았다. 서지현 검사에 따르면 이들이 “우린 고건한테 임명장을 받아 너무 다행이다. 노무현한테 임명장 받은 애들은 창피해서 어떻게 검사 하냐”라고 말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이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구별하고 위계 짓는 순혈주의의 정수를 보여준다. 법무관 출신이라는 말은 남자이며, 군대를 가기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뜻이다. 출신 학교는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닌 비주류일 뿐이다. 주류인 자신들이 비주류로부터 임명받는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된다. 오염된 존재가 된다.

지배 엘리트 집단에서 ‘노바디’로 산다는 것

이 오염 논리의 근간은 인종이다. 애초에 같은 ‘종’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피에르 구베르가 쓴 〈앙시앙 레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서양의 귀족들 역시 자신들을 ‘오래된 혈통’이라고 생각하며 귀족이 아닌 존재들과는 다른 인종(race)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 내부에서의 서열이라는 의미 곧 신분이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혈통이었기에 인종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섞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혈통’이 다르므로 피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오염에 대한 회피는 얼마나 기만적인가? 인도에서 어떤 사원은 여성들이 신전을 오염시킨다며 신전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실제로 여성의 출입을 금지한 신전에 대해 법원이 위법하다고 판결해 여성들이 이 신전에 들어가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신전은 문을 닫고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대청소’를 했다.

여성을 불결하고 오염시키는 존재라고 믿으면서도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폭력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손대는 것은 불결하지만 강간은 강간하는 자를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정화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존중할 수는 없되, 파괴할 수만 있다. 존중의 접촉은 오염이고, 파괴의 접촉은 정화다. 오염이라는 이 문화적 정당화가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에서 여성이 어떻게 비주류로 분류되고 비주류로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말한다. 성폭력이다. 그는 검찰 조직에서 일어나는 여검사에 대한 성폭력이 비주류에 대한 멸시와 조롱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주류에게 성폭력이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너는 우리랑 같을 수 없으며, 여기를 떠나라”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떠날 때까지 ‘조롱하고 멸시하며’ 파괴하고, 파괴한 후에 ‘조롱하고 멸시하며’ 내쫓는다.

〈신분의 종말〉을 쓴 로버트 풀러의 말로 바꾸면 비주류는 노바디(nobody)다. 노바디는 부정으로만 존재한다. 노-바디, ‘아무도 아닌 자’라고 번역되지만 문자 그대로 보면 바디, 즉 몸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노바디는 주류, 즉 섬바디(somebody) 들에 의해 부정당한 바로 그 몸을 침범당하고 파괴된다. 그들이 부정당한 몸은 사회적 몸, 즉 자리다. 그들에게 조직과 사회는 아무런 자리를 주지 않았다. 노바디는 자리가 없는 사람이며, 자리가 없기에 언제나 몸을 침범당하고 강탈당한다.

이 세계에서 비주류들이 단결하여 주류에 대항하는 일은 극히 불가능하다. 풀러가 이야기한 것처럼, 비주류(nobody)의 꿈은 주류(somebody)에게 팔아서라도 주류가 되는 것이지 비주류의 연대를 통한 반란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주류가 되기 위해, 주류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살게 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안간힘’이 별 힘 안 들이고도 살아가는 성골들에게는 멸시와 조롱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스스로가 섬바디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노바디를 경험하며 이를 폭로한 이후, 노바디로서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가며 메스꺼움을 느끼면서도 섬바디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들의 의도대로 쫓겨나지 않고, 그렇다고 다시 섬바디가 되려 하지도 않으며 노바디로서 자리를 지키고 말을 한다. 서지현 검사의 1월4일자 글은 메스꺼움을 견디며, 메스꺼움과 함께 가까스로 건져낸 말이다. 주류, 섬바디에게 이보다 소름 끼치는 공포는 없을 것이다. 이 문서의 가치는 무엇보다 이 지점에 있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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