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빌리를 따로 불러 물어본다. “같이 얘기 나누는 사람은 있니?” 빌리가 대답한다. “얘기할 사람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 빌리가 스티븐스에게만은 마음을 열고 싶어 한다. 선생님 마음속 텅 빈 자리를 빌리가 용케 알아챈 덕분이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면서 딴에는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마고와 샘 앞에서 선생님을 ‘레이철’이라고 부를 때, 그는 정색하며 말한다. “그렇게 부르지 마. ‘미스 스티븐스’라고 불러. 난 너의 선생님이야.”
빌리는 혼란스럽다. 레이철, 아니 스티븐스 선생님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위태로운 2박3일이 지나간다. 하나의 외로움이 다른 하나의 외로움과 부대끼고 부딪치며 부둥켜안는 주말이었다. 예리하게 순간순간을 포착해내는 감독의 비상한 재능이,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영화 한 편을 빚어냈다.
더 세고, 빠르고, 선명하고, 드라마틱한 전개를 바라는 이에겐 ‘미지근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체온과 비슷한 물의 온도를 미지근하다고 느끼는 게 인간이란 사실을 떠올리면서 나는, 우리의 실제 삶에 바투 다가선 이 영화의 온도를 감히 ‘진실의 온도’라고 부르고 싶다. 연일 뜨거운 영화에 몸을 담그고 때를 불리다 지친 어느 날, 이 영화의 기분 좋은 미지근함으로 충일해지던 그날 오후가, 나는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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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의 삶에서 ‘여성’을 길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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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또 들어왔다. 오늘도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 털이 하나도 없어서 쭈글쭈글하고 까칠하게만 보이는 녀석이, 닫힌 집안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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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진실 알려주는 세련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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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이탈리아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는 소리. “라짜로!”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2층에 옮겨놓을 사람이 필요하면, 라짜로! 돌아다니는 닭을 잡아 닭장에 넣을 사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