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학평론은 작품 해석이나 평가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마치지 않는다. 좋은 문학평론은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탐색하고 철학적 의의를 발견해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 비평이나 철학이 되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인문적 전통 가운데 하나인 문학평론은 인문학의 개별 분과인 철학·역사학·사회학을 종합한다. 문학평론이 문학을 대표하는 것을 뛰어넘어 한 시대의 인문적 지성을 대변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페이스북의 ‘좋아요’, 팟캐스트, 파워 블로거, 판매량이 모든 가치 평가를 대신하는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함의 시대다.

김종철의 〈대지의 상상력〉(녹색평론사, 2019)은 격월간 환경·생태주의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하면서 문학과 소원해진 문학평론가가 20년 만에 낸 세 번째 문학평론집이다. 문학이 생산되는 현장을 떠났다고 말하는 문학평론가의 이번 평론집에는 자신의 선언에 부합하는 두 가지 징표가 있다. 하나는 여기 실린 평론의 거개가 한 세대 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1980년대에 쓰여졌다는 것이고(아직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에 발표했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 평론들이 협소한 의미의 문학평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일 앞에 나오는 ‘블레이크의 급진적 상상력과 민중문화’는 무려 35년 전인 1984년에 처음 발표한 글이다. 1947년생인 지은이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에게 매혹된 사정은 다음과 같다. “내가 블레이크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블레이크는 산업혁명 초기의 사회적 격변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온몸으로 체험했고, 그 체험에 의거하여 후세의 어떠한 변혁사상가들보다 더 일찍 그러한 시대 변화의 심층적 의미를 가장 통렬하게 투시하고 포착했던 시인이자 예술가, 민중사상가였다. 그 점에서 그는 산업문명의 발흥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대문명의 의미를 천착해온 숱한 급진적 사상가들에게 길을 열어준 선구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문학적 자해 행위”

산업혁명 시기(1760~1845)와 겹치는 생애를 살았던 블레이크는 산업문명이 인간에게 가하는 억압을 깊이 성찰하고 ‘인간해방’과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급진성이 은닉되고 불필요할 만큼 난해한 시인으로 부각된 것은 영문학 전통 안의 엘리트주의와 상관이 있다. “헤게모니를 장악한 문화체제는 단 하나의 공식적 전통을 유일한 전통으로 인정·옹호”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전통”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려 하지 않는다. 명백히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함의를 갖는 블레이크의 핵심적인 표현들(자유·노예· 해방·폭군·전쟁·평화·우애·형제애)은 인간 영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심리적·형이상학적 갈등과 모순 혹은 그 해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왜곡되었다.

현대의 문학비평이 작품의 형식주의적 미학을 중시하면서 한 작가가 자기 시대의 구체적인 삶에서 절실하게 직면했던 문제를 무시하고 극단적인 전문화와 아카데미즘으로 빠져들게 된 데에는 영문학의 성립 기원이 자리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영국 사회에서는 종교적 신앙이라는 외부적 권위와 형이상학적 체계가 굳건했고 일반인들은 거기에 맞추어 삶을 살았다. 산업문명 탓에 종교적 신앙 체계가 약화되자 19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통합 내지는 통제의 수단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 결과 영문학을 접할 기회를 하층민들에게까지 널리 제공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통제 방법이 그러하듯이 문학은 명시적·직접적 방식이 아니라 암시와 무의식을 통해서 지배 문화에 대한 동의와 순종을 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어도 라틴어도 모르는 민중을 위하여 영어로 된 문학작품들이 정규학교 교과목으로 편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860년대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영문학이 체계를 갖춘 연구 및 교육 분야로 성립되었다. 노동계급의 비정치화를 위한 책략으로 영문학이 성립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 가능한 관점이다.”

산업혁명기와 그 직후의 영국 지배계급은 민중을 순치하는 도구로 문학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 책에 나오는 블레이크·찰스 디킨스(1812~1870) 같은 시인·소설가와 매슈 아널드(1822~1888)·F.R 리비스(1895~1978) 같은 비평가는 그러한 시도에 저항하며 문학과 비평에 민중성과 체제 비판을 도입했다. 이들은 문화적 노력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물질적 역학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문화가 물질적 역학관계에 대한 예민한 인식을 발전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인식이 물질적 역학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물질적 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가능성이 ‘문화=돈’이라는 식으로 전도되고 말았다.

〈대지의 상상력〉은 두 번이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에 나오는 원고의 대부분이 한 세대 이전에 쓰인 구고(舊稿)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 대부분도 19세기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두 번의 도약에는 귀중한 교시가 있다. 첫 번째 도약은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함의 세계와 달리 인문학의 세계에는 구고도 없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폐기되어야 할 주제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두 번째 도약은 이 시대의 문제가 산업혁명 시기의 모순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끔찍하게 대면시킨다.

산업혁명기의 시인·소설가와 비평가들이 고심했던 최대의 문제는 공리주의와 산업화였고, 지은이가 지목한 이 시대의 적은 그것보다 더 악성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허무주의적 문화 이념과 신자유주의라는 가장 야만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지만, 지은이가 인문학적 자해 행위라고 간주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한 대목을 인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인간의 정신활동의 핵을 구성해왔던 가치라는 개념과 가치평가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문학 연구와 문학비평에서도 압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지은이로 하여금 〈녹색평론〉을 창간하게 만든 계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생산력 증대와 고도의 산업화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실망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기승을 부리면서 문학이 역사적 실천 행동에서 탈피해 사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몰두하면서부터 문학 연구와 문학비평에 흥미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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