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주한 프랑스 문화원의 출판 진흥 담당자 두 명이 한국 추리소설의 출간 현황을 알고 싶다며 북스피어 출판사를 찾아왔다.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때 프랑스 리옹에서 매년 추리문학축제가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는 이 행사를 리옹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진행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추리문학축제를 열 때 당신이 도와주면 좋겠다”라는 게 그들이 북스피어를 찾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흔쾌히 돕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오는 3월 리옹에 가서 축제를 참관해보면 어떻겠나. 원한다면 체재비를 지원하겠다.”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3월 마지막 주의 스케줄은 텅텅 비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었지만 나는 괜히 고심하는 척했다. 그즈음의 프랑스는 날씨가 좋은가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담당자 중 한 명이 대뜸 물었다. “근데 당신,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지?”

ⓒ김홍민 제공리옹 추리문학축제의 본행사장. 과거 리옹상공회의소였으나, 현재 시 주최 행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영어라, 형편없다. 일단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둘러댈까 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영어가 부실해서 어렵겠다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일 삼아 찾아온 두 사람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덧붙여보았다. “음, 내 여자 친구가 영어를 잘하는데.” “정말인가. 여자 친구가 함께 가서 통역해줄 수 있나?” “스케줄을 물어봐야 한다.” “당장 물어봐 달라.” 그래서 물어보니 “휴가를 쓸 수 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들의 주문에 따라 나와 내 여자 친구의 이력서를 보내주었다. 프랑스 문화원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단다. 떨어지면 창피할 것 같아, 6년째 라디오에 출연해 추리소설을 소개한다느니 신문에 미스터리 칼럼을 연재한다느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각종 재미난 기획도 했다느니 하면서 별 쓸데없는 자랑을 잔뜩 써놓았다. 며칠 뒤 답장이 도착했다. “파리 프랑스 문화원에서 서류가 통과되었습니다. 여자 친구분 참석도 가능합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주관하는 ‘국제 전문가 프로그램’에는 스페인·인도·이탈리아· 노르웨이·폴란드·루마니아·영국·러시아·튀니지·독일·캐나다의 추리 전문가들이 참여할 예정입니다.”

아아, 그리하여 영어 잘하는 여자 친구와 함께 3월의 프랑스에 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파리를 경유하고 11시간을 날아서 리옹에 도착했다. 유럽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날씨가 제아무리 쌀쌀해도 해가 쨍한 날이면 이곳 사람들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심처럼 밖으로 나와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눈다. 우리도 그 옆에 앉아 맥주라도 마시고 싶었으나, ‘국제 전문가 프로그램’이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관계로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리옹 추리문학축제(3월29~31일)는 프랑스의 추리소설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케 뒤 폴라르(Quais du polar)’는 우리말로 하면 ‘추리물 플랫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한데, 리옹 추리문학축제의 정식 명칭이자 행사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조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관람객 10만여 명이 40만 권 이상 구매

‘폴라르(polar)’는 크라임 픽션, 탐정소설, 스릴러와 범죄영화를 포괄하는 단어다. 이 대목에서 생긴 궁금증은 ‘그렇다면 리옹은 폴라르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였다.

듣자 하니 역사적으로 리옹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알렉상드르 라카사뉴라는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의사이자 범죄학자로 독극물 분야의 전문가, 혈흔 패턴 분석의 개척자였다. 라카사뉴는 리옹에 적을 두고 1885년부터 1914년까지 범죄인류학에 관한 연구와 교육 활동을 지속적으로 병행했다. 이때 에드몽 로카르라는 이가 그의 연구를 도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간혹 ‘과학수사’라고 적힌 옷을 입고 범죄 현장의 지문을 채취하거나 혈흔을 조사하는 감식반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로카르가 바로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라는, 일명 ‘로카르의 법칙’을 정립하여 현대 과학수사에 혁혁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프랑스의 셜록 홈스라는 별명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울러 범죄 소설가인 프레데리크 다드, 알랭 들롱이 주연한 〈형사 이야기〉의 자크 드레이 감독, 스릴러 영화로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 등이 리옹에서 태어났거나 리옹을 중심으로 활동한 바 있다.

ⓒ김홍민 제공‘도시에서 펼치는 수사’ 프로그램에 참여해 미션을 수행 중인 관광객.
2005년 4월, 리옹시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착안하여 출판사, 도서관, 서점, 민간단체와 함께 ‘Quais du polar’를 기획했다. 리옹은 일찍부터 인쇄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고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니 책과 연관된 행사라면 뭘 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추리’를 중심 콘텐츠로 정한 것이다. 행사 초기에는 ‘왜 하필 추리냐’라는 볼멘소리가 시민들은 물론 출판 관계자들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시를 대표하는 행사로 밀고 나가기에 추리는 격이 떨어지지 않나, 이왕이면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학을 추구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주장이었으리라. 그와 같은 주장이 관철되었다면 리옹의 축제도 ‘스테레오타입’의 행사가 되었을지 모른다.

주최 측이 뚝심 있게 밀어붙여 회를 거듭할수록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추리 팬들도 점차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6월 성수기에 집중적으로 출간되던 추리물이 이제는 추리문학축제의 개막에 맞춰 3월에 출간될 정도라고 하니 대략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독자와 서점, 출판사들이 참가비를 내지 않고, 리옹시와 여러 민간단체의 후원만으로 행사비를 충당한다는 점도 열띤 호응의 이유인 듯하다. 시와 민간이 의기투합해 국제적인 성격을 보강한 결과, 축제는 독일의 라이프치히 도서전이나 이탈리아의 마리나 도서전(Marina di Libri) 같은 행사에서 벤치마킹할 만큼 독자적인 존재감을 띤 도서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리옹 추리문학축제는 올해 20여 나라에서 작가 140명이 참여했고 10만여 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축제를 즐겼으며, 리옹의 11개 독립서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마켓에서는 40만 권 이상 책이 팔렸다. 수도가 아닌 ‘일개 지방도시’에서 개최한 도서 이벤트로 이만하면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주최 측은 리옹을 색다른 관광지로 부각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내가 참여했던 가장 흥미로운 프로그램인 ‘도시에서 펼치는 수사(Investigation in the City’)에 대해 설명해볼까 한다. 일종의 도시 탐험이라 할 수 있을 이 프로그램의 취지는 해외 관광객까지 포함한 참가자들로 하여금 리옹의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게 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에게는 빨간색 미션 책자가 제공된다. 미션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월25일(축제 시작일)에 리옹에서 범죄가 발생했다. 현장에는 북유럽에서 온 Cervid(사슴과의 동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수사 담당자인 나는 ‘네발짐승 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당신(참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내가 얻은 모든 단서를 알려줄 테니 범죄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사건을 해결해주기 바란다.” 참가자들은 위와 같은 사건의 배경 설명을 이해한 다음, 동봉한 지도를 참고하여 극장(Step 1)에서부터 시청(Step 16)까지 범죄 현장 16군데를 방문해 주어진 미션에 대한 정답을 기재하고 마지막 장소인 시청에 정답지를 제출해야 한다. 축제 스폰서인 에어프랑스와 리옹의 호텔, 전자책(e-book) 플랫폼 업체에서 제공한 항공권, 호텔 숙박권, 전자 단말기 등의 상품이 푸짐하게 걸려 있어서 나도 열심히 단서를 쫓아보았다. 하지만 복수의 시나리오 작가 팀이 촘촘하게 설정해놓은 미션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도시에서 펼치는 수사’와 ‘박물관에서 벌이는 탈출게임(Escape Game at the Museum)’이 이어지는 한편에서는 교도소와 병원에 갇혀 문화와 책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작가 10명이 교도소를 방문해 죄수들과 만나 추리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건상 내가 현장을 방문할 순 없었고 참여 작가 중 한 명의 소감을 들었다. 그가 들려준 에피소드를 요약해보자면 하나, 작가와의 대화는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잠시나마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기회였다. 둘, 그들을 만나는 동안 작가인 나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셋, 그들은 추리소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나에게 ‘어떻게 이런 범죄를 구상할 수 있었지?’ 같은 질문을 했다. 넷,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계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다섯, 덕분에 그들은 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듯했다. 여섯, 실제로 행사에 참여했던 수감자에게 “내가 쓴 소설을 한번 읽어봐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리옹의 활기를 ‘한국 추리문학축제’로

그 외에도 어린이를 위한 추리 교실, 학생들을 위한 라이팅 워크숍, 추리소설 번역자를 위한 번역 배틀 등 모든 시민이 추리라는 장르를 즐길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한 프로그램들이 눈길을 끌었다. 당장 나부터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몇 권의 프랑스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그중 피에르 르메트르라는 걸출한 작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세계는, 혹은 세계의 추리소설은 연결돼가는 게 아닐까. 되풀이하지만 주한 프랑스 문화원의 지원으로 리옹에 다녀온 나의 임무는, 내년 가을쯤 한국에서 열릴 ‘추리문학축제’의 기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리옹 추리문학축제의 긍정적인 활기를 엿보는 동안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약간 기대해주시길.

기자명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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